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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봉헌(주의봉헌축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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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봉헌. 연중 4주)/ 말라3:1-5, 히브2:11-18, 루가2:22-40

      참된 봉헌

 

요즘 루게릭 병에 걸려 죽어가는 스승과 인터뷰 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미치 엘봄이 지은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란 책을 보며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스승은 제자에게 이런 말을 남깁니다.

 

“자기 인생을 의미 있게 살려면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바쳐야 하네.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헌신하고, 자신에게 생의 의미와 목적을 주는 일을 창조하는데 헌신해야 하네.”라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더 가져야 하고, 더 높아져야 하고, 더 알아야 행복해 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승은 제자에게 “자네가 줄 수 있는 것을 타인에게 주는 것” 우리를 정말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소중한 것을 타인과 나누는 것 속에 생명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참된 행복, 참된 진리는 “받고 주는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 것”이라고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

 

“물은 답은 알고 있다”는 책을 쓴 에모토 마사루는 또 이런 말을 합니다.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행복에 파장을 맞추어라”

그런데 그 행복의 파장은 이런 겁니다.

“욕심을 내고 남과 비교해 버릇하면 불행해지고 건강도 해치게 된다. 반면 자신의 처지에 감사하고 남과 나누며 잘 어울려 살면 내 작은 행복이 큰 공명이 되어 이웃과 사회, 나아가 온 세계가 행복과 활력으로 가득 차게 된다.”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참된 축복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주님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하느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삶이 아닐까요?

오늘은 주님의 봉헌 축일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모세가 정한 율법대로 40일 만에 아기 예수를 하느님께 봉헌한 것을 교회는 오랫동안 지켜왔습니다. 이 날 제단과 가정에서 쓰일 양초를 축복해서 쓰곤 하였습니다. 이것은 봉헌된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 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마리아와 요셉의 봉헌은 우리가 어떻게 주님께 봉헌된 삶을 살아야 참된 축복이 되는지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 마리아와 요셉은 “누구든지 첫 아들을 주님에게 바쳐야 한다.”는 율법에 따라 아기를 성전에 봉헌했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첫 아들처럼 귀한 존재가 있을까요?

내 생명보다 귀한 게 첫 자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귀한 아들조차도 내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것은 없습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이 뜻을 아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자녀요, 하느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밝힐 수 있는 빛이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이 가르침에 순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억해야할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와 요셉이 자신의 뜻과 의지에 따라 봉헌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따라 봉헌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 순간부터 봉헌된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봉헌된 삶을 위해서는 자기 헌신과 열정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때 정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헌신이 하느님의 율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현주 목사님이 쓴 “말씀의 등불로 길을 밝히고”라는 글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동기가 맑고 깨끗하지 않으면 그로써 이루어지는 행위가 겉보기에 의로운 일처럼 보인다 해도, 하느님의 눈에는 의로운 일이 아니다.”

 

동감하는 말씀입니다. 자신을 드린 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향기입니다. 그것이 마음이 되었던, 물질이 되었던, 아니면 나의 재능이 되었던 그것은 참으로 고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봉헌이 자신의 뜻과 의지에 따라 봉헌되었다면 그것은 결코 아름다운 향기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집에 방문했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고 마르다는 주님의 시중을 드는데 경황이 없었습니다. 둘 다 봉헌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듣는 봉헌, 마르다는 시중을 드는 봉헌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마르다에게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라고 하시며 책망하셨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말씀을 듣는 일이 시중드는 일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마르다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시중드는 일이 아무리 아름다운 헌신이라 할지라도 시중을 들면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뜻대로 헌신한 행위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가 사람을 구하기 위해 불 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나의 모든 재산을 나누어 준다 하더러도 그 행위가 율법을 따르지 않는다면 울리는 괭가리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기껏 봉사하고 무례하다면, 교만하다면, 자신을 자랑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봉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불속에 뛰어들어도, 내 모든 것을 나누어도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지 않고, 여전히 겸손하다면 그 행위야 말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봉헌이요, 헌신입니다. 이 때 비로소 우리가 행한 헌신과 봉헌은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이 되고, 이방인들에게는 주님의 길을 비추는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와 요셉이 율법대로 한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비둘기를 예물로 바쳤다는 것입니다.

“이 아들은 나의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입니다.”라고 하면 됐지 왜 마리아와 요셉은 그렇게 가난하면서도 예물을 바쳤을까요? 예물을 바치는 구체적인 행위가 없이는 참된 봉헌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물은 내 자신이 땀 흘려 얻은 소출입니다. 그런데 요셉과 마리아는 아들을 봉헌하는 의미로 예물을 바친 것입니다. 아들을 바치는 구체적인 행위는 자신의 소출을 드리는 헌신으로 표현했습니다.

때문에 성경은 십일조 생활을 하라고 가르칩니다. “너희는 열의 하나를 바칠 때, 고금도 덜지 말고 성전 곳간에 가져다 넣어 내 집 양식으로 쓰게 하여라. 그렇게 바치고 나서 내가 하늘 창고의 문을 열고 갚아 주는 지 갚아 주지 않는지 두고 보아라.”

묘하지요.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는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사업하는 사람이 투자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의 투자는 십일조입니다. 십일조 생활은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축복의 문을 열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십일조를 드릴 수 있는 마음의 채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재능의 십일조, 물질의 십일조, 시간의 십일조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지를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둘째, 진정한 봉헌은 생각과 말과 행실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전례를 개정된 전례문을 따라 한번 촛불을 붙였습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두 번 촛불을 붙였습니다. 한 번은 복음을 읽을 때, 또 한 번은 성체를 축성할 때입니다.

복음이 진리의 주님의 말씀이라면 성체 축성은 주님의 삶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말씀과 삶이 하나이셨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행위가 죽고, 행위가 없으면 말씀이 죽습니다. 이 둘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용서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 뺨을 대주고,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런 용서의 모습을 자신의 삶 속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모욕하고 있는 자들을 향하여 아버지께 용서를 청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참된 용서를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언제나 겸손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로만 섬기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손수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세상의 빛이라고 우리가 고백하는 것은 그분의 말씀이 그럴듯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말씀이 곧 삶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참된 봉헌의 삶이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입니다.

시므온은 봉헌하기 위하여 온 마리아를 향하여 말합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참된 봉헌은 헌신과 고통을 요구합니다.

초가 빛을 내려면 자신을 죽이는 고통과 아픔을 겪지 않고 빛을 낼 수가 없는 것처럼 봉헌되어야할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기를 봉헌하는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은 한없이 기뻤습니다. 얼마나 귀한 아들입니까? 성령으로 잉태된 아들, 이스라엘과 온 세상을 구원할 아들, 그러나 이런 것만을 기억한다면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예리한 칼에 찔리는 아픔도 함께 기억하라고 합니다. 이처럼 봉헌된 삶에는 기쁨도 있지만 아픔도 있습니다. 예리한 칼에 찔리는 것과 같이 아픔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 봉헌된 삶을 위해 찔림과 아픔을 경험하셨습니다. 주님의 일이 환영만 받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퇴박을 맞기도 했습니다. 미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 길을 가셨습니다. 그것은 이런 것을 인정하는 봉헌만이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축복되어진 초는 성전과 우리의 가정을 비추게 됩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께서 봉헌되셨던 것처럼 우리도 봉헌되어져야할 작은 촛불임을 늘 고백합니다. 우리 자신이 주님 앞에 봉헌될 때 주님은 이 봉헌을 통해 우리를 축복해 주시고, 이 세상을 밝고 맑게 하는 빛이 되게 하시고 소금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봉헌된 이날 우리도 또한 주님처럼 하느님께 봉헌되어야할 존재임임을 고백하는 이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