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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하는 공동체, 생명을 주는 공동체(연중 21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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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8. 25(연중 21주)/ 이사58:9-14, 히브12:18-29, 루가13:10-17

치유하는 공동체, 생명을 주는 공동체

 

삼국유사를 보면 참된 신앙의 길이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한 스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번은 스님이 냇가를 건너다가 향연을 즐기던 양반들을 만납니다. 귀족은 스님을 불러 매운탕을 먹게 했지요. 불가에서 살생을 금하기 때문에 육식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나 무섭게 몰아세우던지 스님은 그만 매운탕을 먹고 말았습니다. 아니다 다를까 양반들은 땡중이라고 말하면 돌을 집어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말합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먹는 것도 인연인데 나에게 똥을 눌 시간을 주십시오”

그런데 스님은 숲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냇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엉덩이를 내밀고 똥을 누는데 그것은 똥이 아니라 살아 있는 물고기가 뚝뚝 떨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조상이 생각하는 종교관입니다. 종교란 죽어버린 양심, 어두워진 마음을 다시 살려내는 것이 참된 종교라고 본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 안에서 서로 치유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시편을 보면 믿음을 통해 주실 축복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네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네 모든 병을 고쳐주신다.

네 목숨을 구렁에서 건져주시고 사랑과 자비의 관을 씌워주신다. 네 인생에 복을 가득 채워주시어 독수리 같은 젊음을 되찾아주신다.

어떻습니까? 믿음 안에서 이런 기쁨을 맛보고 있습니까? 하느님은 그 믿음을 통하여 병을 고쳐 주시고, 새롭게 하시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회당에 들어가셔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무엇을 가르치셨을까요? 아마 어떻게 사는 것이 복된 삶인지 가르치셨겠지요. 그런데 사람들 사이를 보니 십 팔년 동안 병마에 사로잡혀 허리가 굽어져서 몸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예수님을 말씀을 듣고 있는 여자가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를 가까이 불러 그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사실 설교가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신앙의 본질, 그것은 병든 삶을 바로 잡는 것입니다. 병든 삶을 그대로 두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싫든 좋든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소명이 있다면 병든 가치관, 병든 마음, 병든 가정과 세상을 치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사람이 되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뉴스를 들어보니 우리 사회는 갈등을 치유하지 못하는 나라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갈등으로 인해 우리가 치러야할 시회적 비용이 무려 일 년에 24조원이나 된다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4대강 부실보다 더 심각한 병은 갈등을 치유하지 못하는 병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병든 여인을 치유한 것이 논란이 되었던 것입니다. 18년 동안 허리를 피지 못하고 살아온 여인이 치유되었다면 기쁜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정작 이를 기뻐해야할 회당장은 군중들과는 달리 이 여인을 안식일에 치유했다는 이유로 “분개하여” 예수님께 따져 물었던 것입니다.

왜 회당장은 예수님과 같은 하느님을 믿고 있으면서 여인을 치유할 수 없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이런 치유가 일어난 것을 함께 기뻐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느님의 법을 들어 분개하였을까요? 그렇다면 회당장의 믿음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요? 우리는 어떤가요? 믿음 안에서 깨어진 관계가 치유됩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 병든 마음이 치유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문제입니다. 바로 이것을 찾아내고 극복해야합니다. 그래야 치유하는 교회, 치유하는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첫째, 내가 아니라 타인의 입장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풍경소리”라는 책을 보면 이런 글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종이 그 속을 비운 이유는 멀리까지 소리를 울리기 위함이고, 거울이 세상 모습을 평등하게 담을 수 있는 것은 그 거울이 맑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비워야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처럼, 세상을 맑게 비추기 위해 자신이 맑아야 하는 거울처럼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기를 비워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치유하고 남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생활을 한다할지라도 남의 입장에서 보는 마음의 여유가 없이는 상처받은 관계, 아픈 마음이 치유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차피 18년 동안 앓던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왜 구지 법을 어기면서 꼭 안식일에 고쳐야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일 고쳐도 되는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은 내 입장에서 본 것이지 지금 18년 동안 고통 속에 있는 이 여인의 입장에서 본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 입장에서 보려는 습관이 있습니다. 이것이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나에게 손해가 되면 반대합니다. 그리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의 상황은 무시된 채 그 사람에게도 옳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말이나 행동들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모릅니다.

광수 생각이란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생선 대가리만 좋아하신다. 그런데 내 아내도 똑같이 생선대가리를 좋아한다.” 사실 대가리만 좋아할 여인이 어디 있나요. 조금만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 어머니도, 아내도 생선살을 좋아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 만이라도 내가 아니라 타인의 입장에 설 수만 있다면 남을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그렇습니다. 신앙을 생활을 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폭을 넓혀 가는 것이요, 그 넓어진 이해의 폭으로 서로 꼬인 아픔마음, 관계들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십시오. 주님은 자신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여인의 입장에서 보셨습니다. 18년 동안 병마에 시달린 여인, 그래서 한시라도 이 병마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여인의 마음에서 판단하셨습니다. 치유는 바로 여기서부터 이리어납니다. .

주님은 누구든지 내 제자가 되려면 자신을 버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 자신을 버려야 한다고 하십니까? 자신을 버리지 않고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집장에 서볼 때 비로소 치유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이 좋다고 해도,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갖고 있고, 깨달음을 얻었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서서 보는 마음을 넓혀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바른 신앙의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신앙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모든 관계가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이란 내 입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서서 보는 마음을 넓혀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처받은 모든 것들을 치유해 가는 것입니다.

둘째, 사랑의 본질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안식을 거룩하게 지켜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날에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학자들이 싫어하는데 굳이 안식일을 범하면서까지 이럴 필요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율법의 근본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안식일이 되면 누구나 쉬어야 합니다. 아무리 일을 시키고 싶어도 쉬게 해야합니다. 몸 붙여 사는 노예뿐만 아니라 가축까지도 쉬게 해야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노예였을 때는 쉼 없이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안식일이 되면 쉬게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왜 안식일에 쉬게 했을까요? 나는 일을 시키고 싶지만 일하는 사람을 위해 쉬게 하는 것, 이것을 사랑이라 하고, 자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을 지키면서 기억해야할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일을 지키면서 가장 보잘 것 없는 노예까지도 사랑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고, 그 자비를 닮아 살아가는 자비 공동체가 사랑공동체가 되야 한다는 것을 안식일을 지키면서 기억했습니다. 여러분 하느님의 치유가 언제 일어날까요? 서로 사랑할 때 일어납니다. 하느님께서 날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느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이게 성서에 기록된 치유의 역사입니다.

때문에 이사야 1장 11절 이하의 말씀은 진정한 안식일을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엇하러 이 많은 제물을 나에게 바치느냐? 나 이제 숫양의 번제물에는 물렸고 살진 집승의 기름기에는 지쳤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아라.”라고 하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몸을 씻어 정결케 하라. 내 앞에서 악한 행실을 버려라 ..착한 길을 익히고 바른 삶을 찾아라. 억눌린 자를 풀어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이게 안식일을 지키는 근본입니다. 하느님께서 날 사랑하하신 그 마음으로 서로 사랑할 때 우리 안에 있는 상처, 이 세상과 가정에서 일어나는 아픔과 상처가 치유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당장은 어떻게 했습니까? 안식일을 지켰지만 그 사랑이 빠져버렸습니다. 회당장이 예수님처럼 사랑의 마음을 가졌다면 여인을 치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감사성찬례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보시기 바랍니다.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현주 목사님의 글을 보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신앙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눈먼 신앙은 더 고약합니다.”

그렇습니다. 예배에 참여한 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드리는 예배는 오히려 회장장처럼 이기심에 눈이 어두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안을 받습니까? 성령의 감화로 서로 사귀는 일이 있습니까? 서로 애정을 나누며 동정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사랑을 나누며 마음을 합쳐서 하나가 되십시오.”

사랑은 모든 것을 치유하고, 새롭게 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사랑 안에 머무는 성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셋째,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지 않고는 결코 치유할 수 없습니다.

왜 회당장이 여인의 아픔을 인식하지 못하였을까요? 그것은 이기적인 욕심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들의 이기적인 마음을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 가운데 누가 인식일라 하여 자기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물을 먹이지 않느냐? 이 여자도 아브라함의자손인데 십팔 년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다.”

이렇게 자기 재산을 지키는 데는 안식일 규정 따위는 생각하지 않으면서 한 사람의 고통을 덜어 줄 때는 안식일을 규정을 들어 가로막고 있는 이런 행위는 모두가 욕심과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어리석음입니다.

얼마 전 전유익 선생님이 쓴 “혼자 잘 살문 무슨 재민겨”란 책을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저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은 “죽어라고 일하고, 죽어라고 사들이고, 죽어라고 버린다.”는 것입니다. 욕심과 탐욕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남보다 더” 라고 하는 이런 어리석음이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더 가져야 하고, 더 배워야 하고, 더 예뻐야 한다는 이런 어리석음이 봐야할 것을 보지 못하게 하고, 들어야할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고, 깨달아야할 진실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는 회당장이라 할지라도 결국 이기적인 욕심 앞에서 그 믿음이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율법을 완성해야할 사람이 오히려 율법을 들어 주님의 일을 방해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일을 마치 하느님의 일인 양 행동했습니다.

신앙이란 바로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이런 이기적인 탐욕을 끝없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할 세상을 보고,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굳이 안식일에 여인을 고쳐 주신 이유는 안식일이 필요가 없어서가 아니라 진정한 안식일을 올바로 지키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이야 말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기억하고 그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초대해 주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1고린4:20)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과 행실을 통해 하느님의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상처받은 사람이 치유되고, 좌절과 실망에 빠진 사람이 희망을 보고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어둠 속에서 빛을 보고,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이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히브리서 말씀은 “공동체 안에 독초가 생겨나 분란을 일으키고 그것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히브12:14)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가정,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건강합니까? 주님이 보이신 이런 치유가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회당장처럼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맹인에게는 아무리 아름다운 그림을 보여준다 할지라도 그저 두툼한 종이에 불과한 것처럼 우리가 회당장과 같은 이런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면 우리가 아무리 주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린다 해도 주님의 은혜 안에 머물 수 없습니다. 이제 주님 안에 머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서로가 상처받은 아픔을 치유하는 교회공동체, 가정공동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