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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과 함께 천국을(연중 24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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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인과 함께 천국을

 

얼마 전 아이 로봇이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기계화된 세계 속에서 어떻게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그린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는 주인공이 사고로 물에 빠진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차에는 어린아이도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물의 압력 때문에 안에서 열수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밖에서 도와주어야만 합니다. 이 때 한 로봇이 다가옵니다. 그런데 로봇은 계산을 합니다. 어른이 살 확률 40% 어린이가 살 확률 20% 이라고 계산이 나옵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라 아이를 먼저 구하라고 외쳐댑니다. 그러나 로봇은 주인공을 구출해 냅니다. 이때부터 주인공은 로봇에 대한 증오심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로봇에게는 인간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성, 그것은 계산된 마음이 아니라 연민입니다. 나약한 자를 먼저 사랑할 수 있는 마음, 내가 아니라 남을 먼저 배려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여기서 한 과학자는 예견합니다. 인간성이 없는 로봇은 결국 인간을 파멸로 이끌게 될 것이라고, 그래서 이 과학자는 인간성을 가진 아이로봇을 만들어 세상을 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이 메말라버린 과학이 얼마나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지 이 영화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계화된 세계 속에서 인간성, 다시 말하면 사랑의 감정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지요. 이 영화에 말하는 사랑은, 마치 잃어버린 양을 찾아 떠나는 목자가 연상됩니다. 참된 인간성, 그것은 이익과 실리로 판단되는 마음이 아니라 자비심, 연민으로 표현되는 사랑의 마음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란 말을 했습니다. 이는 기계화된 문명 속에서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꼬집어 한 말입니다. 과거에 비해 얼마나 빠르고 가까워 졌습니까? 얼마나 편리하고 풍요로워 졌습니까? 그런데 얼마나 바쁜지 옆을 볼 시간조차 없습니다. 스쳐가는 사람은 많지만 함께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리 찾아봐도 찾기 어려운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독합니다. 불안합니다. 어쩌면 “타인은 지옥”이란 이 말은 지금 우리의 현실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꼬집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자살 율이 세계에서 제일 높다는 것 아십니까? 그것도 다른 선진국의 2배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20-30대 자살 율은 단연 최고입니다. 암이나 사고로 죽은 사망률보다도 높습니다. 왜 한참을 살아야할 청년들이 삶이 아니라 죽음을 선택할까요? 저는 고독과 불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등만 최고로 여기는 우리사회에서 이웃은 더 이상 없습니다. 모두가 나의 적입니다. 아무리 손을 내밀어도 잡아줄 이웃이 없습니다. 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일등도 꼴지도 두렵고 고독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타인은 지옥입니다. 내가 물리쳐 이겨야할 원수입니다. 이게 요즘 경쟁사회 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니다. 여기에 모두가 매몰되어 있습니다. 가진 사람도 없는 사람도 여기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가진 사람은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고, 없는 사람은 쟁취하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때문에 타인은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타인은 천국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맛나는 세상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타인들과 함께 축복을 나눌 수 있는 천국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가정을 천국으로 만들어야 하고, 교회를 천국으로 만들어야 하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어 가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어떻게 하면 타인과 함께 천국을 만들어 갈 수 있는지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행복하고 더불어 평화를 나눌 수 있는가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마침 세리와 죄인들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입니다.

사실 못마땅하게 여길 만한 일도 아닙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런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삶을 열어주어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까? 이런 사람들과 어울려야 할 사람입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이 누군가의 가르침을 받고 변화되고 새 삶을 살아간다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 안에는 여려가지 편견과 아집 때문에 서로 치유하고 감싸주어야 할 상대를 오히려 미워하고 증오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건 하느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주님은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타인이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 될 수 있는지 가르쳐 줍니다.

어떤 사람이 양 100마리를 갖고 있었는데 한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흔 아홉 마리를 그대로 둔 채 한 마리를 찾아 나선 것입니다. 여러분 이 행위를 이해하십니까?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까? 혹 그 한 마리가 황금 털을 가진 양이라면 몰라도 저 같으면 한 마리를 포기하고 99마리를 지키겠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이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마음, 그래서 그 한 마리의 양을 찾게 되면 기뻐하는 마음, 바로 이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에서 무엇이 느껴지십니까?

저는 한 사람이 보입니다.

주님은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를 말씀하시며 회개가 없는 99마리가 아니라 회개하는 한 마리의 양이라고 했습니다. 이 한 사람 때문에 천사도 기뻐하고 하느님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흔히 회개하면 잘못을 뉘우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회개란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깨닫고 자신의 삶을 180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시편의 다윗처럼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고 행위를 바꾸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을 개혁하고, 세상을 바꿉니까? 한 사람입니다.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꾼 그 한 사람이 세상을 개혁합니다. 바로 그 사람이 희망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희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능력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그가 마음을 바꾸어 하느님을 향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로의 말씀처럼 “세상을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된 사람”(로마12:2)입니다. 주님은 잠자고 있는 아흔 아홉이 아니라 깨어 있는 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한 사람만이 세상을 개혁하고, 세상을 살맛나는 세상으로 바꾸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아침 우리 모두를 천국이 되게 하기 위하여 이 한 사람이 되기를 결단하는 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누가 회개한 사람이요,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느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입니까?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떠날 수 있는 사람입니다. 99 마리를 두고 한 마리를 찾아 떠는 모습에서 하느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습을 통해 하느님의 마음을 읽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내 마음을 일치시켜야 합니다.

첫째는 소외 된 자에 대한 아픔을 함께 느낄 수 있는 마음입니다.

한 마리는 99의 무리에서 이탈된 양입니다. 까불다 그랬는지, 힘이 없어 그랬는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이탈 되었고, 또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양을 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그게 천국입니다.

주님은 지금 여기에 있는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 중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잘 것 없는 형제를 향한 사랑, 바로 이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이었습니다.

하느님은 그 찬란한 에집트의 문명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은 그 문명 속에서 소외되고 아파하는 노예들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구해내셨습니다. 이게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초대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몸에 비유하여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몸 가운데서 다른 것들보다 약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우리는 몸 가운데서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부분을 더욱 조심스럽게 감싸고 또 보기 흉한 부분을 더 보기 좋게 꾸밉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소외되고 나약한 사람을 먼저 볼 수 있는 마음,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보십시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외적인 신앙생활은 나무랄 때가 없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켰고 십일조 생활을 철저히 했습니다. 또 종교적인 규례에 의해 불쌍한 사람을 구제하기도 하였습니다. 외적인 신앙생활의 모습을 보면 정말 나무랄 때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입니까? 세리와 죄인들이 새 사람이 되고 치유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입니다. 의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건강한사람이 아니라 병든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약 의사가 건강한 사람들과 어울린다면 그는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병든 자를 치유하고 보살피는 것이 참된 의사인 것입니다. 이처럼 소외된 이웃을 볼 수 없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 사람들을 내쳤던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이란 지향점을 가져야 합니다.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 뭔가 우리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마음과 관심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 여기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베푼 사랑이 곧 나에게 베푼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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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이 천국이 되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자신을 포기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바로 이런 마음이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기꺼이 나를 포기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99마리를 두고 1마리를 찾아 떠날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내가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동안 99마리를 잃을 수 있습니다. 아마 이런 계산을 했다면 그 사람은 결코 떠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한 마리의 양을 향해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내 양 99마리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삭을 제물로 바칠 수 있었습니까? 내 아들, 내 대를 이을 유일한 자손이라고 하는 “나”를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바로 이 포기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 되게 했고, 이삭을 믿음의 아들로 키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나를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나를 기꺼이 버릴 수 있는 마음,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이 세상을 보십시오. 나를 버리지 않고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이치입니다. 소금이 맛을 낼 수 있는 것도, 촛불이 빛을 낼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자기를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고 하는 이기적인 욕심, “나”라고 하는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진실이 보이고, 참이 보입니다. 주님도 이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자신을 죽이셨습니다. 왜 진실 된 말은 많은데 진실 된 열매가 없을까? 진실은 자신을 죽일 때만 진실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을 버릴 수 있을 때 비로소 99마리를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향채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사랑의 마음입니다.

어떻게 아흔 아홉을 포기하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갈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그것은 사랑을 기초로 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5명의 아들을 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4명의 아들이 건강하고 똑똑했습니다. 그러나 한 아들은 병 치리를 하느라고 변변치 못했습니다. 이 때 사람들이 4명의 아들은 건강하니 병든 한 아들은 포기하라고 한다면 어머니는 이 말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병든 아들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오히려 건강한 아들보다 이 병든 아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쏟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선택할 수 있는 용기는 이해득실이 아닌 사랑에 기초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 사랑만이 아흔아홉이 아닌 어려움에 처한 한 마리 양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과 애정은 한 마리의 잃은 양을 타인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존재로 생각합니다. 때문에 잃어버린 양 찾지 않고는 절대로 평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법정 스님의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물질적인 결핍이라든가 신체적인 장애 때문이 아니다. 행복할 수 있는, 행복을 받아들일 수 있는 따뜻한 가슴을 잃어가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따뜻한 가슴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내 것만 보았지 남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런 무관심이 우리를 어둡게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게 하고 미워하게 합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조금만이라도 어려운 이웃과 동일시 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따뜻하고 아름다울까 생각했습니다. 인류의 모든 불행은 가난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잃어버리는 데서 시작합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를 부르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에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길 잃은 양을 찾아 떠나는 목자가 되어 험한 들판을 향해 가라고 부르십니다. 진정한 기쁨은 잃은 양을 찾아 그를 어깨에 매고와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의 회복이 있을 때 하느님의 주시는 평화와 기쁨, 행복이 넘치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룩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99 이 아니라 1을 볼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는 마음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한 마리의 선택이 바로 회개한 마음이요, 나와 우리 모두를 천국을 만들어가는 마음이라고. 바로 이런 마음을 품을 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씀합니다. 이 시간 내가 기꺼이 그 한사람이 되겠다는 결단의 시간이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