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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무니없는 일을 당했을 때 주를 의지하라(연중 29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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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20 (연중29주일 )/ 창세32:23-32, 2디모3:14-4:5, 루가18:1-8

터무니없는 일을 당했을 때 주를 의지하라

 

 

어느 날 문자메시지가 왔습니다.

“너 세상 그렇게 살지마!”

순간 내 마음은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이런 메시지를 보냈을까? 참으로 어이가 없었지요. 그런데 잠시 후에 또 한 통의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잘못 보냈습니다.”

참 묘하지요. 잠시였지만 이 이유 없는 메시지는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또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이처럼 터무니없는 일로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믿는 사람에게 오해를 사기도 하고, 속기도 합니다. 또 내 뜻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서로 다른 생각과 판단들 때문에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라고 했습니다. “얼울한 일”을 사전을 찾아보니까? “특별한 잘못도 없는 데 누명을 쓸 때 쓰는 말”입니다. 사실 이유 없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마음이 쓰리고 아픈지 모릅니다. 그리고 얼마나 혼란스럽고 힘들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원하던 원하지 않던 간에 이런 어려움을 피해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가족 간에도, 그리고 이웃 간에도, 교회 안에도 늘 이런 문제들이 생겨납니다. 원치 않던 사고가 일어나고, 원치 않던 문제가 일어납니다. 누구나 이런 문제를 겪게 될 것이고, 여전히 이런 일들은 우리를 힘들게 하고 혼란스럽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지혜롭고 슬기롭게 헤쳐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터무니없는 일들은 우리의 길을 방해하는 암초와 같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걸리면 우리의 믿음은 산산조각 나버립니다. 때문에 이 암초를 피해가야 합니다. 어떻게 이런 암초를 피해갈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은 그 지혜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선 하느님을 향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터무니 없는 일을 당하면 그것을 갖고 내 안으로 끌고 들어오지 마십시오. 그러면 아주 복잡해집니다. 일이 해결되기는커녕 절망과 분노에 휩싸이기 쉽니다.

오늘 시편을 보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드네, 도움 어디서 오는가. 나의 도움은 주님께로부터 온다.” 그렇습니다. 이럴 때는 나를 향하기 보다는 주님을 향하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은 나를 지켜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지키시기 위해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런 터무니없는 상황 앞에 분노하고 억울해 하기 보다는 주님을 잡고 의지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그런 고약한 재판관을 찾아가 졸라대기 시작했습니다.

과부가 왜 그토록 끈질기게 졸라댔을까요? 비록 의롭지 못한 재판관이라 할지라도 재판관이니 졸래대면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바로 잡아 주리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과부는 몰인정한 재판관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확신을 갖고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요? 이런 상황 앞에서 주님께 매달리고 있습니까?

어쩌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주님께 의지하려고 하기 보다는 나의 분함과 억울함 때문에 나에게 사로잡혀 버립니다. 그래서 결국은 내 의지대로, 내 뜻대로 하고 맙니다. 이게 터무니없는 일을 당할 때 처신하는 우리의 모습일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은 과부처럼 의로운 재판관이신 하느님을 찾으라 하십니다. 마치 야곱처럼 환도 뼈가 부러지는 아픔이 있었어도 천사의 삽바를 놓지 않았던 것처럼 주님께 매달리라고 합니다. 야곱도 처음에는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처리했지요. 주님이 가라고 해서 갔지만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터무니없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형이 4백 명의 부하를 데리고 온다는 것입니다. 두렵지요. 그래서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자기와 가족은 뒤로 빠졌습니다. 그리고 선물과 종들만 먼저 보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요. 몰인정한 재판관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재판관이십니다. 우리의 머리카락 까지 세고 계시며, 골수를 쪼개 그 생각과 처지를 다 아시는 재판관이십니다.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고, 나를 지켜 주시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야곱은 터무니없는 오해 앞에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의 방식으로 할 수 없었습니다. 두려웠거든요. 그러나 이 때 하느님께 물었습니다. 환도뼈가 부러질 정도로 물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느님의 방식대로 하기로 작정합니다.

그런데 놀랍지요. 그토록 자신이 두려워했던 일은 별일이 아니었습니다. 400명의 군사를 데리고 온 것은 자신을 미워해서 치기 위해 온 것 아니라 환영하기 위해 그랬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야곱의 문제를 아주 간단하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터무니없는 일들을 보면 처음에는 무슨 큰 일 같지만 사실 별일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과부처럼 우리들의 문제를 사랑의 재판관이신 하느님께 청해야 합니다. 맡겨야 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 문제를 스스로 풀어가려고 하십니까? 풀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안에 분노와 좌절만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과부처럼 맡기라고 하십니다.

토마스 머튼의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마음이 상했지만 변명하지 않을 때, 내 마음 내 명예에 대한 방어를 하느님께 온전히 맡길 때, 침묵은 양선함입니다.

형제들의 잘못을 드러내지 않을 때, 지난 과거를 들추어 내지 않고 용서할 때, 판단하지 않고 마음속 깊이 용서해줄 때 침묵은 자비입니다”

어떻게 이런 마음이 가능할까요? 하느님께 맡기는 마음이 아니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까?

인터넷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글을 하나 더 소개합니다.

“내 마음에 불평이 쌓일 때면 나는 늘 남을 보았습니다. 남이 나를 불만스럽게 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나에게 쌓이는 불평과 불만은 남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 맘에 기쁨이 없을 때면 나는 늘 남을 보았습니다. 남이 내 기쁨을 빼앗아가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나에게 기쁨과 평화가 없는 것은 남 때문이 아니라 내 맘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남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그 문제를 찾으려는 이런 아름다운 마음은 하느님께 맡길 때만 가능한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잠언3장 5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마음을 다하여 야훼를 믿어라. 잘난 체하지 말고 무슨 일을 하든지 야훼께 여쭈어라. 그가 네 앞길을 곧바로 열어 주시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에페3장 20절 이하의 말씀에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면서 우리가 바라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일을 하느님께 맡기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열어주실 것이요, 우리가 생각하거나 바라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부가 확신을 갖고 매달린 것처럼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느님께 매달리십시오. 이것이 모든 위기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용기를 잃지 말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쉽게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 ‘너무나 성가시게 구니 소원대로 판결해주어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찾아와서 못살게 굴 것이 아닌가?’ 라고 말한 고약한 재판관의 말을 새겨들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느님은 우리가 인내하기를 원하십니다. 쉬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응답이 이루어 질 때까지 쉬지 않고 기도하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 3절에서 “이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희망이 어떻게 생겨났습니까? 그것은 고통과 시련 앞에서 좌절하지 않는 끈기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의로운 일이라면 실패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중국 고사성어를 보면 우공이산이란 말이 있습니다. 우공이란 사람이 거대한 산을 옮겼다는 말에서 유래한 말인데 인내를 갖고 꾸준히 하노라면 그 뜻을 이룬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며 인내하며 꾸준해 행하는 사람은 하늘이 돕는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끈기를 갖고 임하기를 원하십니다. 과부처럼 그 청이 이루어질 때까지 끈기를 갖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쉬 오지 않더라도 기다리라. 기어이 오고야 말 것이다”(하바2:2)라고 했습니다. “선을 행하십시오. 꾸준히 하노라면 거둘 날이 올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수고하고 기다려야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이 남습니까? 그 삶을 선택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지식도, 느낌도 아닙니다. 삶입니다. 주님은 모든 말씀을 마치시고 “마지막 날에 믿음을 볼 수 있겠느냐” 하셨습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삶입니다. 선택입니다. 결국 신앙이란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택의 문제요, 삶의 문제입니다. 야곱이 자신의 뜻과 의지, 자신의 방식을 버리고 하느님을 선택한 것처럼 하느님의 뜻을 따라가 것입니다. 하느님의 도움이 어디에서 올까요? 선택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바울로가 로마로 후송될 때의 일입니다. 바울로는 유리굴라라는 태풍을 만나 열나흘 동안 풍랑에 시달렸습니다. 그리고 엄친데 덮친 격으로 배마져 암초에 부딪쳐 파손될 지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멀리 섬이 하나 보였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배가 가라앉기 전에 어서 그곳으로 헤엄쳐 가라고 소리쳤습니다. 아마 바울이 아니었으면 사람들은 모두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 있는 힘을 다해 헤엄쳐 나왔습니다.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은 해변 가에 모두가 쓰러져 있었습니다. 배고픔도 배고픔이지만 무엇보다도 추웠을 것입니다. 바울로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 불을 지폈습니다. 쉴 틈도 없이 마른 나뭇가지를 한 아름 안아다가 불 속에 넣었습니다. 바울로라고 왜 힘들지 않았겠습니까? 아마 바울도 다른 사람들처럼 몸이 천근만근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쳐있는 이들을 위해 장작을 들어 불 속에 넣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장작을 불 속에 넣으려고 할 때 그 속에 숨어 있던 뱀이 바울로의 손을 물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모두들 놀랐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 사람은 분명히 살인자다. 바다에서는 살아 나왔지만 정의의 영신이 살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하고 수군 거렸습니다.

왜 사람들이 이런 말을 했을까요? 자신들을 위해 일을 하다가 이런 일을 당했는데 사람들은 바울로를 위로하기는커녕 저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도 바울로가 행했던 모든 행위가 시기와 증오의 대상이 되고, 질투와 저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죄인인 주제에 잘난 체 하네, 이런 일을 한다고 우리가 너를 좋아할 것 같아!”

사실 이런 말이 바로 독사가 아닙니까? 바울로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정말 큰 상처를 받지 않았겠습니까? 독이 퍼지듯이 온 몸을 떨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몸이 부어오르거나 당장 쓰러져 죽으려니 하고 지켜보았다”고 했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바울로가 이 일로 크게 실망하고 낙담하고 그 들을 향해 저주를 퍼부으리라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울은 아무 말 없이 그 뱀을 불속에 넣어버렸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여러분 독사가 뭡니까?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줍니까? 나를 무시하는 말이 있나요, 모함하는 말이 있나요. 그렇습니다. 나를 아프게 하는 독침을 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상처를 주는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나도 독사처럼 독을 쏘겠습니까? 아니면 이런 독사를 불 속에 넣어 버리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런 독사가 나를 물었을 때 그 독에 빠져서 아파하고, 분노할 것이 아니라 불속에 넣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지식을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마음으로 느끼게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지식으로 알고, 마음으로 느낀 이 진리를 입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의 삶으로 살아가는 신앙이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야곱처럼 환도뼈가 부러지는 아픔이 있어도, 주님이 주신 길을 선택할 수 있고, 살아 갈 수 있는 용기를 원하십니다.

억울한 일로, 또 이유 없는 시련과 아픔이 있을 때 기도하십시오. 주님이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자, 눈을 들어 주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도움이 거기에서 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