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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성서대학 졸업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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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성서대학 신학과정 과제물인 ‘죽음과 보살핌에 관한 묵상’을 적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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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보살핌에 관한 묵상

                                                            문규옥(카타리나, 주교좌성당)

 

 

살다보면 사는 일에 바빠 다른 일들을 잊고 살게 된다.

바쁜 일이 얼마나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함을 가릴 수 있는

잠깐의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우리는 일상을 당연히 바삐 살고 있는 것이다.

 

오래전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질주하다 잠깐씩 멈추어

내 영혼이 잘 따라 오는지 뒤를 돌아 보았다한다.

빠른 이 시대에 사는 우리는 그들만큼의 마음에 여유도 없이

앞만 보고 계속 질주한다.

 

이렇게 끝없는 질주의 골인 지점은

우리가 생각하는 먼 장래의 그 지점이 아니다.

바로 지금이 될 수도 내일이 될 수도 있음을

우린 잊고 사는 것이다.

 

예기치 못하는 그 시간 그 지점에 본의 아니게 덜컥 멈추어 서게 되면

우린 당황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절망한다.

 

나는 행복해야 마땅한데 내가 왜 불행의 늪에 서 있게 되는건지…

누가 왜 나를 이 자리로 밀어 넣었는지….

믿을수 없고 타협할 수 없는 현실에 삶이 무너져 내린다.

 

주변의 모든이에게 마음이 닫히고 급기야 하느님을 원망하며

스스로 담을 쌓고 그 속으로 들어가 버리기도한다.

내가 그랬다.

 

나름 잔잔한 희노애락으로 일상의 삶을 살아가던 우리 가족에게

어느 토요일 새벽, 집으로 찾아 온 경찰이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며

들려준 큰아들 베드로의 교통사고 소식은

우리에게 고통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되었다.

 

서둘러 달려간 서울대병원 응급실에서 장례식장으로 옮겨가기까지,

장례식장에서 벽제화장장을 거쳐 성당 안식의 집에 오기까지

불과 일주일도 안 되는 사이에

우리가족은 27년동안 사랑해온 건장한 아들을, 형을 떠나 보내고

그 허탈함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한달의 입원과 치료, 3개월여의 직장의 적응기를 거쳐

겉으론 아무 문제없이 실생활에 적응해갔다.

 

처음 얼마동안은 오후늦게 출근하여 차 한잔 마시곤 집으로 왔다.

점차 시간을 늘리고 사람들과 대면 시간을 늘려가며

사무실에 머무는 시간을 정상적으로 맞춰 나갔다.

 

남편 니콜라는 아들 잃고 마누라도 잃을까봐 노심초사 하다가

내가 정상 페이스를 찾아가자

그때부터 더 우울증이 심해지고 힘들어 했다.

 

작은아들 요한은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은듯했지만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워낙 말 수가 적고 조용한 요한이어서

잘 견디고 있는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베드로의 일주기를 앞두고

정신적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남편은

일행없이 단독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 산행을 선언했고,

아들 요한은 영국으로 언어연수를 가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동안 참아 왔던 감정들이 일시에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우리가족은 서로 놀랐다.

그리나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서로서로 모두의 뜻대로 따르기로 했다.

 

이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각자 생각과 마음을 정리 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결정은 참으로 현명한 결정이었던것 같다.

히말라야에서 산행 첫날 니콜라는 이별 후

처음으로 꿈에 베드로를 만났다했다.

 

대자연에서 하느님의 위대한 창조와 섭리를 경험한 니콜라는

그 후 조금은 안정이 되었지만 그후 3주기가 돌아오자

또한번 고행을 택해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향해 떠났다.

마음의 고통만큼이나 힘든 코스였다.

 

난 아침마다 성당에 나가 기도를 드리고

저녁엔 그날그날의 코스를 짚어가며 기도로 니콜라와 함께했다.

귀국후 니콜라는 6개월여의 회복기간을 필요로했다.

그만큼 우리의 고통은 이루 말 할수 없었고

이겨나가려 몸부림을 쳤었다.

 

그 시기엔 주어진 고통이 우리의 마음과 가슴을 닫게한 듯

타인을 위한 어떤 위로나 배려는 생각지도 못했다.

 

한동안은 장례식장에 갈 수 없었다.

연락도 없었고, 같이 가자는 사람도 없었다.

난 심정적으로 많이 달라져있음을 스스로 느끼고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TV나 주변에서 불시의 사고나

불치의 장기투병으로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

예전같이 마음이 아프고 동정이 가질 않고

“하루아침에 죽기도하는데 살아 있는것도 행복이지.”하는

매정하고 강팍한 마음이 자꾸만 들었다.

 

물론 입 밖으로 표현은 못했지만

뒤틀려오는 나의 심사는 스스로도 ‘내가 왜이러지?’ 하면서도

알수없는 그 마음은 계속되었다.

 

사실 나는 쇼크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마비로

아들의 장례가 어떻게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응급실 신세를 지며 입관도 화장예식도 지켜보지 못했다.

 

모든일이 끝나고 정신이 드니

베드로를 주님께 강제로 빼앗긴 것 같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그러던 중 꽁꽁 매였던 나의 마음이

봄 눈 녹듯 녹아내린건 어이없게도

어느 교인분의 장례식장에서였다.

주일이었는데 교인들과 같이 만도를 드리러갔었다.

 

신부님과 모인 교인들이 하느님께 죽은자를 위하여

거룩하고 경건하게 죽음을 고하고

주님께로 간 영혼을 위하여 진실된 마음을 모아 드리는

간구와 찬송를 들으며 난 큰 충격의 위로를 받았다.

 

가슴에 천둥이 울리듯 뭔가가 벅차오르며

기쁨의 눈물이 끊이질 않았다. 다른분들 뵙기가 민망했다.

그날 그야말로 남의 장례식에서 난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하느님의 깊은 사랑의 모습을 느끼게 되었고 위로를 받았으며

이제껏 마음에 맺힌 하느님에 대한 원망이 풀리게 된 것이었다.

 

“ 잠들어있는 이분은 얼마나 행복할까?

베드로도 이렇게 행복하게 사랑받으며 주님곁에 갔겠구나.”

많은분들의 간절한 간구와 사랑이

하늘나라의 주님께 다달았을 것을 생각하니

그 감사와 위로와 평안이 일순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한것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낮에 경험한 감동을 남편에게 이야기 해 주었고,

베드로와 이별후 처음으로

남편과 베드로의 장례때 있었던 일들과

오셨던 분들에 대하여 이야길 나누었다.

내가 알지 못했던 많은 일들이 있었다.

 

뒤늦게 나는 그리도 힘들었던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이 각각의 방법으로 사랑을 베풀었음을 깨닫게되었다.

 

베드로를 위해 병원 마당에서 새우잠을 자며 울부짖었던선후배, 친구들, 그리고 가족들, 지인들,

다녀 가셨던 주교님 신부님 수녀님 대모님 교인들

기타 여러 많은 분들의 모습이 떠 올랐다.

 

수도회에 기도를 부탁해주신 지금도 알지 못하는 그분.

그리고 베드로 기일날 몰려왔던 친구들과 선후배들을 위해

특별 추모미사를 준비해 주셨던 신부님.

홍대앞 홀을 빌려 일주기 추모 음악회를 열어

초대받은 신부님과 우리 가족을 감동케했던 동아리멤버들.

 

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그리운 마음에

베드로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온 친구.

전화를 건 저도 놀라고 벨소리에 놀라 받았던 나도 놀라며

서로 울며 끊었던 기억.

 

쓰지않는 나의 메일에 쪽지를 보내와

몇 개월 후에 안식의집에서 베드로를 만나고 떠난

해외에 사는 친구.

 

아직도 끊이지않고 베드로의 싸이를 방문하는 친구들.

명절때면 어김없이 안부문자를 보내오는 친구들.

매년 추모일 아침미사에 새벽잠을 뿌리치고

나와 같이 기도를 드리는 친구들.

 

그중 한 친구가 말했었다.

“낌쌍~ 너는 분명히 좋은곳으로 갔을거야.

나도 열심히 살아서 너있는 곳으로 갈거다.

몇십년후에 보자.

그러나 난 네 몫까지 오래오래 살다 갈거다.

짧고 굵은것도 좋지만 너는 너무 심했다.”

 

주일날 성당의 미사 시작종이 울리면

난 우리 베드로의 모습을 떠올린다.

한 살,두살,세살….

내 생각 속에는 베드로의 커가는 모습이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듯 또렷하게 떠오른다.

 

성당마당에서 개구지게 뛰놀던 주일학교때,

니콜라소년합창단 시절, 세실리아성가대 때, 군에 입대할 때…

스물일곱번째 종이 울리면 그녀석의 모습은 사라지고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서른세번의 종을 맞이하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나 사흘만에 부활하신 주님을 기억한다.

 

나의 믿음 안에서 베드로는 언제나 부활하여

우리와 함께 있음을 나는 믿는다.

 

아주 오래전 난 꿈을 꾸었었다.

주교좌의 성 세례자요한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있었다.

아침미사 같이 사람들이 몇 명 뿐이었는데

우연히 뒤를 돌아보게되었다. 난 깜짝 놀랐다.

 

왼쪽 회랑 기둥 뒤부터 빙 둘러 오른쪽 회랑기둥 뒤쪽까지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빽빽이 서서 같이 미사를 보고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리가 비좁아 겨우 얼굴만을 내밀기도 했다.

“비어있는 의자도 많은데 왜 다들 회랑 뒤쪽에서 저러나?”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다들 돌아가신 분들이었다.

우리는 모르고 있었지만 망자들은 회랑 안쪽엔 들어오지 못하는듯했다.

그날 나는 깨달았다.

미사는 살아있는 우리들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우린 모르고 있엇지만 돌아가신 분들과 늘 함께 있었던 것이다.

 

작년 부활절즈음에도 니콜라와 내가 늘 앉는 그 자리로

베드로가 찾아와 같이 미사 드리는 꿈을 꾸었다.

너무도 기쁘고 감사했다.

 

요즘도 미사때면 그애와 늘 같이 기도하는 느낌이다.

베드로의 실체는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나에겐 늘 함께하는 베드로가 곁에있다.

 

그로부터 죽음은 우리가족의 친숙한 친구가 되었다.

아주 가끔 우리는 베드로를 생각하며

그녀석의 이런저런 추억을 이야기한다.

 

물론 웃음도 나고 눈물도 난다.

그리운건 사랑하기 때문이니까.

이렇게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해 주는 부모가 있음에

그녀석은 분명 행복해 할거다.

 

요즘 니콜라와 나는 우리의 죽음에 대해서도 편안하게 이야기 한다.

우린 하느님곁으로 가는 길을 늦추기 위해

억지로 인간의 의술에 의존하지 않기로했다.

 

언제라도 누가 먼저라도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 들이고

평안히 보내기로 했다.

 

베드로를 보낸 후 한두달 쯤 됬을 때

베드로 앞으로 우편물이 도착했다.

“조혈모세포은행”

가슴이 뛰고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잘 알지도 못하는 협회에서 하필 이런시기에 우편물이 오다니.

백일기도 중이었기에 그녀석 책상앞에 그 우편물을 올려놓고

편하지 않은 마음으로 기도를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백혈병에 걸린 후배가 있었는데

그 친구를 위해 무서워하는 친구들을 설득시켜

단체로 검사받고 가입을 했다고했다.

 

베드로가 이 엄마보다 참으로 마음 깊은 아들이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죽음과 친구가되어 살아가는 지금.

친구가 될 수 밖에 없는 지금.

가장 마음에 걸리는 일은 그동안 요한의 마음을 돌보지 못한 미안함이다.

나의 슬픔을 이기지 못해

늘 비틀거리는 엄마의 모습만을 보여 준 것 같고

형을 잃은 동생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미안함이

늘 마음 한켠에 남아있다.

 

한번쯤 서로 솔직한 대화를 시도 해 볼까 생각도 했지만

예전보다 좀 더 마음을 살피며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더 마음에 닿을거란 생각이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이라 했다.

 

얼마전 산청에 갔다가

우연히 일회용 프라스틱 스픈을 이어 붙여

큰 모형을 만드는 유명한 조각가의 작품을 보게되었다.

 

하나 하나의 프라스틱 스픈이

제 각각의 자리에 붙어있으므로 인해

작가의 마음을 표현하고있었는데

그 작품을 보면서 우리들도 한낱 일회용 인생을 살아 갈 뿐이지만

살아있는 동안은 주님의 멋진 작품의 일부분이 되어

주님께서 허락하신 이 고귀한 생명을 빛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내 삶의 등대가 되어주시는

십자가의 예수그리스도를 마음에 품고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보다 더 강한 의무감이 든다.

 

그래야만 열심히 살다 간 그 녀석도

좋아 할 것을 알기에…

 

끝.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아빌라의 대 데레사 기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