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말씀과 신앙나눔 평화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가라지는 뽑아 버릴까요?(연중 16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평화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가라지는 뽑아 버릴까요?(연중 16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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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16주) / 지혜12:13.16-19, 로마8:12-25, 마태13:24-30, 36-43

평화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가라지는 뽑아버릴까요

 

인도의 민담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주 진기한 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이 나무는 두 개의 큰 가지가 있는데 가지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열매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에 나는 열매는 생명의 열매요 또 다른 한 가지에서 열리는 열매는 죽음의 열매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가지에서 난 열매가 생명의 열매인지 죽음의 열매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이 나무의 열매를 따 먹고 싶었지만 아무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이 마을에 큰 가뭄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굶주림 속에서 허덕이면서도 감히 황금빛 열매를 따먹지 못했습니다. 혹시 죽을까 겁이 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굶어 죽어가는 아들을 보다 못한 한 어머니가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먹고나죽자”라고 생각하고는 오른쪽에 달린 황금빛 열매를 따 아들을 먹이고 자신도 먹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열매를 먹은 아들도 자신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 날 이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 나무에 달린 오른쪽 열매를 따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아무리 따먹어도 그 열매는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따먹는 즉시 그 자리에 또 다시 황금빛 열매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제야 알았습니다. 오른쪽 가지에서 열리는 황금빛 열매는 생명의 열매, 그렇다면 왼쪽에서 열리는 황금빛 열매는 죽음의 열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다음날 아침 왼쪽 나뭇가지를 분질러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잘못 따먹어 사람들이 죽는 일이 벌어질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다음날 아침 이 나무는 죽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공동체 안에서 가장 무서운 것, 공동체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 그것은 옳고 그름을 아는 것보다 서로를 포용하지 못하고,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오늘 가라지 비유의 말씀은 하늘나라를 비유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난주 씨앗의 비유는 개인의 신앙생활에 초점을 두었다면 오늘 가라지 비유의 말씀은 공동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혼자 살수는 없습니다. 싫든 좋든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 공동체가 건강하지 못하면 우리가 아무리 행복하게 살고 싶어도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사는 가정, 교회, 이 사회가 하늘나라가 되야합니다.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가 야합니다.

그런데 평화로운 공동체,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할 산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 사이에 있는 가라지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주 좋은 씨를 뿌렸습니다. 그런데 농부가 밭에 나가 보니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주인님, 가라지도 뿌리셨습니까?”

“아니다 아마 가라지는 사탄이 뿌리고 간 모양이로구나?”

그러자 농부는 말합니다.

“그러면 그 가라지를 뽑아버릴까요?”

농부는 가라지를 뽑아낼 자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말합니다.

“아니다 그냥 놔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힐라!”

 

자연 속에서는 절대로 밀이 가라지가 되고, 가라지가 밀이 되는 법은 없습니다. 때문에 부지런한 농부는 가라지를 그대로 두지 않습니다. 가라지는 있는 대로 다 뽑아버립니다. 그런데 공동체는 아닙니다. 주님은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가려면 농부가 가라지를 뽑듯이 그렇게 가라지를 뽑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 안에는 우리가 기억해야할 아주 귀한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선과 악은 구분하고 판단은 하되 심판하지는 말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래야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참된 공동체는 남을 정죄하기보다 용서하고 서로를 감싸줄 수 있는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말씀의 주제입니다.

하느님은 악한 것을 뽑아버리기 보다는 그 악한 것을 선한 것으로 바꾸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악에서 선으로 선에서 악으로 끝없이 넘나드는 게 사람입니다. 오늘 잘했다가 내일 잘못하는 사람이 있고, 오늘 잘못했다가 내일 잘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의의 잣대로 모두 정죄해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은 의로운 판단도 중요하지만 형제를 사랑으로 품어줄 수 있는 사랑을 키워가라고 하십니다.

농부가 밀과 가라지를 분별하듯이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지혜, 너무나 중요합니다. 농부는 가라지와 밀을 판별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살아가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선하고 악한 것인지 판별해야합니다. 그러나 판별하고 정죄하는 것보다 더 귀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그 죄와 잘못, 실수를 감싸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노아가 하루는 술에 취에 벌거벗은 채 벌거벗은 채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런 행위는 분명히 잘못된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함은 이런 행위를 한 아버지를 정죄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 앞에 이런 잘못을 낱낱이 일러바쳤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뒷걸음질을 쳐서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주었습니다. 아버지의 행위를 용서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누구를 축복해 주셨습니까? 잘못을 저지른 아버지를 정죄한 ‘함’이 아니라 벌거벗은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주었던 ‘셈’과 ‘야벳’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게 성서가 말하려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비밀입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당신의 의로 우리를 심판하셨다면 우리는 다 지옥에 떨어져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의롭다 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데레사 수녀도, 바울로도 하느님 앞에서 의롭다할 수 없습니다. 바울로는 자신을 죄인 중의 죄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성서를 보면 바울로와 같은 의이 또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로조차도 자신은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있는데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왜 일까요? 우리가 의로웠기 때문입니까? 우리가 회개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죄를 공의로 판단하시지 않고 사랑으로 용서하십니다. 이게 하느님의 구원 방식입니다.

그렇습니다. 남을 정죄하기는 쉬워도 용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용서와 사랑만이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워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형제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주님은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고 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씀인가요? 판단은 하되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저는 농촌에서 목회를 한 경험이 있어서 농부에 대해서 잘 압니다. 농부는 무엇이 벼인지 가라지인지 귀신같이 압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려 가라지를 뽑아내는 데는 정말 귀신같습니다. 아마 주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실 때 이런 상황을 모르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다 아셨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은 옳고 어떤 것은 그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만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만한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냥 놔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가라지는 불에 태워 버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농부의 방식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따르라는 말입니다. 농부는 자신이 가라지를 뽑겠지만, 우리는 그 뽑는 일을 주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입니다. 현장에서 잡혔으니 다른 말을 할 구실이 없습니다. 이 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묻습니다. 이 여인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런데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들 중에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을 돌로 치라”

 

그리고는 주님은 침묵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사람은 모두들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여인을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내 자신이 정죄함을 멈추고 주님께 맡겼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죄지은 여인에게 새 삶을 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정죄하기를 조금만 멈출 수 있다면, 정죄하기 전에 하늘의 뜻을 조금만 물을 수 있다면 정말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은총의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수많은 공동체들이 정말 행복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죄함으로 인해 깨지고 불행해지는 경우는 너무나 많이 보아 왔습니다.

 

주님은 “추수 때까지 밀과 가라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고 하셨습니다.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기 전에 좀더 인내하라고, 상대방의 입자에서 보라고, 이해하고 배려하는 사랑을 품어 보라는 말로 들립니다. 이런 마음으로 우리의 가정, 우리 교회, 그리고 이 사회가 서로 소통한다면 얼마나 화평하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을 보십시오.

자기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는 크게 보이는 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할 때는 좀 더 남의 입장에 서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죄는 잠자고 있는 자에게 생겨납니다.

사탄은 잠자고 있는 영혼을 노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깨어 있지 않으면 얼마나 쉽게 사탄에게 나의 마음을 빼앗길 수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나라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로마서의 말씀입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8:18)

그렇습니다.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분명히 가라지입니다. 그러나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 가라지가 나에게 영광을 안겨줄 채찍이 될 수 있습니다.

 

자, 우리 안에 가라지가 있습니까?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나요. 손해를 끼치고 상처를 입히는 형제가 있나요? 나를 무시하고 정죄하는 사람이 있나요? 그래서 나도 무시하고 정죄합니까?

 

우리 안에 가라지를 뽑기보다는 감싸주며 어떨까요? 그리고 정죄하고 판단하기 보다는 조금만 더 하늘을 우러러 뜻을 물어보면 어떨까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평화와 축복이 우리가운데 임하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가라지를 뽑지 않으시고,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에나 단비를 내려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하고 감싸 안음으로 평화로운 가정, 평화로운 교회, 평화로운 이 세상을 만들어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