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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어린양을 보라!(연중 2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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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2주일)/ 이사49:1-7, 1고린1:1-9, 요한1:29-42

하느님의 어린양을 보라 !

 

여러분은 지금 나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내 삶의 목표가 달라지고 나의 인생관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세례자 요한은 자기를 향해 오고 계시는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요한은 자기를 향해 오고 있는 예수님을 향해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놀랍지요. 이 소리를 듣고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를 따라 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한과 그의 제자들에게 보여 진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실 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실 어린양으로 나에게 오신 분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바로 어린양의 비밀을 함께 나누어 보고자합니다. 만약에 내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이 어린양임을 확신한다면 시편 노래처럼 “주께서 나를 멸망의 구덩이에서 들어 올리시고 오물 진창에서 나를 건지셨다”라고 찬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서 속에 감추어져 있는 어린양의 비밀은 뭘까요?

우선 “하느님의 어린양”은 죄를 사하여 주시는 희생의 양입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하느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여!”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양은 우리의 죄를 없애주기 위하여 희생되는 양입니다. 이 진리를 알려면 창세기로 가야합니다.

하느님이 만들어 준 에덴에서 행복하게 살던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꾀임에 빠져 하느님께서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이때부터 인간에게는 죄가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죄를 알기 시작한 인간이 보여준 최초의 행위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자신의 수치스런 죄를 가리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하찮은 것입니까? 그 잎이 얼마나 가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만들어 가린 무화과나무 잎으로는 자신의 죄를 덮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인간에게 하느님께서는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가죽옷을 만들어 그 죄를 가려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죄에 빠진 인간을 심판하거나 벌을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그 죄를 가려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버림받을 줄 알았는데, 심판을 받을 줄 알았는데 하느님은 오히려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가죽 옷을 만들어 입히신 이 일을 통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십시오.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의 죄를 가려줄 가죽옷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하느님은 인간의 죄를 덮어주시기 위해 희생의 양의 필요한 것입니다. 희생된 양이 없이 어떻게 가죽옷을 만들 수 있었겠습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인간의 죄를 씻어줄 옷을 만들어 주시기 위해 어린양을 택하신 것입니다.

요한 1서 4장 10절 말씀을 보면 이 진리를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 제물로 삼은 아들이 바로 예수입니다.

요한은 외칩니다.

“저기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신다!”

그렇습니다. 그 양은 우리의 죄를 씻어줄 어린양이십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의 어린양”은 하느님의 심판을 면하게 한 양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가혹하게 괴롭히던 에집트를 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2장 12절 말씀을 보면 “그 날 밤 나는 에집트 땅을 지나가면서 전국에 있는 맏아들을 모조리 치리라. 또 에집트의 신들도 심판하라. 나는 야훼이다. 집에 어린 양의 피가 묻어 있으면 그것이 너희가 있는 집의 표가 되리라. 나는 에집 땅을 칠 때에 그 피를 보고 너희를 쳐죽이지 않고 넘어 가겠다. 너희가 재앙을 피하여 살리라”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어린양의 피는 하느님의 심판을 면하게 할 표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신다고 외쳤습니다. 그 분은 죄에서 구원할 양이요, 영원한 심판을 면하게 하실 양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로마서에서 이 기쁨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그리고 데살로니카 전서에서는 아주 분명히 선포합니다.

“죽은 사람들에 관해서 여러분이 알아 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 가실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어린양”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 말 안에는 우리도 가서 어린양 양의 피를 발라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시간 우리 모두가 어린양의 피를 발라야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예수의 피를 바를 수 있을까요?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그 피를 바를 수 있는 비밀을 알려주셨습니다.

 

“와서 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요한은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가신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두 제자들은 지체 없이 예수께로 갑니다. 이처럼 우리도 예수를 향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도 예수를 찾아 이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만족하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온 요한의 제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이 질문은 요한의 제자에게 던진 질문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예배에 참여한 나에게 주신 질문입니다. 우리는 이 물음에 응답해야 합니다. 이 응답에 따라서 내 삶의 목표가 바뀌고 내 삶이 바뀌어집니다. 여러분은 이 물음에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내 자식이 잘되게 해달라고 할까요? 지금 내 생활이 어려우니 금전을 달라고 할까요? 건강을 달라고 할까요? 더 높은 지위를 달라고 할까요?

 

그런데 제자들은 이 물음에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지금 당신이 묵고 계신 곳이 어디인지 알고 싶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주님께 원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그 많은 소원들을 놔두고 “지금 당신이 묵고 계신 곳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보기 위해 묵고 계신 곳을 보여 달라고 했을까요?

 

여러분 예수님이 묵고 계신 곳을 보면 무엇이 보일까요? 그 분의 삶이 보이고, 그 분의 인격이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주님의 삶을 보고, 그분의 인격을 보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프란시스 성인은 그분이 묵고 계신 구유를 보았을 때 그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세상적인 부자에서 영적인 부자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생명을 평화를 주는 성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아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얼마 전 구역교제를 보면 “인생의 오후 네 시”를 경험하라고 합니다. 주님을 만난 시간이 오후 4시입니다. 와서 보라고 한 말씀대로 주님 안에 머문 시간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시간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린양의 신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필립비 3장 8절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엇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묵고 계시는 곳을 아는 것, 이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위해 사도 바울로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진정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알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을 알기 보다는 내가 원하는 많은 것들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를 더 바라고 원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단 하나입니다.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기 원합니다.”

다시 복음을 보십시오. 이제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은 와서 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어린양의 피를 내 마음에 바르는 행위입니다.

사과의 맛은 아무리 설명해도 그 맛을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이는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와서 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가야합니다. 어디를 가야 예수를 만날 수 있고, 그분의 인격을 느낄 수 있나요. 저는 말씀과 성사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교구 표어가 생각납니다.

“말씀과 성서에서 생수를 긷자”

그렇습니다. 말씀과 성사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을 보아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먹고, 그분의 인격을 느껴야 합니다.

 

“들어라 ,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 승리하는 자는 마치 내가 승리한 후에 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옥좌에 낮은 것같이 나와 함께 내 옥좌에 앉게 하여 주겠다.(묵시3:20-21)

 

지금 주님께서 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십니까? 주님은 지금 이 시간 문을 두드리십니다. 와서 보라고 두드리십니다. 문을 열고 주님을 보십시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섭니다. 무엇이 길이고, 무인이 진리요, 무엇이 생명인지 확신이 섭니다. 그리고 이 확신은 나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이게 복음의 역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 주셨다” 그렇습니다. 피를 바른 다는 말은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셋째, “하느님의 어린양”은 먹으라고 내어주신 일용할 양식입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모든 가정은 어린양 한 마리를 준비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양을 잡아 불에 구어 먹으라고 했습니다. 이 양식은 에집트를 떠나야할 백성들이 먹어야할 양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하느님께 매일 아침저녁으로 어린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그 수를 평일의 배로 늘려서 아침저녁으로 두 마씩 어린양을 잡아서 제물로 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 먹어야할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요한이 저기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신다는 말은 우리가 먹어야할 양식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베드로처럼 고백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여러분은 이 시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입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향해서 오시는 어린양, 우리가 먹고 마셔야할 양식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 당신의 살과 피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양식을 먹고 마심으로 진리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 양식은 땅에서 나는 양식이 아닙니다. 식당에서 얻을 수 있는 양식이 아닙니다. 이 양식은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코이노니아를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곧 예배입니다. 말씀과 성사를 통해 하느님은 우리에게 하늘의 맛나를 주시고, 천상의 양식을 주십니다.

 

이제 결론입니다. 주님과 함께 머물었던 제자들을 보십시오. 안드레아는 깨달았습니다. 메시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형제에게 가서 외칩니다.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확신에 찬 믿음입니까?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이제 주님 안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면 살아가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