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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윤리] 네 육신이 죽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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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육신이 죽더라도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마태 10,28-29: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단돈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런 참새 한 마리도 너희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도 낱낱이 다 세어두셨다.

사람 하나 뽑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장관과 국무총리를 추천하고 인사청문회를 통과하기까지의 과정이 너무나 멀고 험난해 이제는 청와대에서 후보자에게 연락이 가면 모두들 고사한단다. 만일 자리 욕심에 눈이 멀어 냉큼 수락했다간 청문회에서 온갖 수모를 당하는 것은 물론, 결코 치유될 수 없을 정도로 집안 망신을 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사실 국무총리가 없으면 행정부가 유지될 수 없으니 총리를 서둘러 뽑긴 뽑아야 하는데…….  상황이 심각해지자 대통령은 이른바 ‘공정사회’의 기치를 온 나라에 내걸었고 앞으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욕을 채우려는 무리를 발본색원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런데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안 되려고 그랬는지, 외무부 장관 딸의 특채 비리가 드러났고 이전 장관들의 전력까지 의심을 받으면서 앞으로 줄줄이 청문회에 소환될 모양이다. 아무튼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장이 마련된 셈이기는 하다. 우리나라가 언제 이렇게 되었을까? 위장 전입에, 뇌물 공여에, 불법 투기에, 군복무 기피에, 자기 식구 봐주기에. 도대체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윤리 불감증이 어느 정도에 이르렀기에 하나같이 이런 꼴인가?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런 때 지혜를 얻으려 성서를 들여다보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당연한 의무이기도 하다.

엄격한 윤리관

그리스도교는 엄격한 윤리를 갖고 있는 종교로 유명하다. 물론 어느 종교라도 ‘가능한 한 못된 짓을 해라.’고 가르치진 않겠지만 그리스도교는 유별나게 강한 윤리의식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사형과 낙태는 안 된다는 식이다. 아니, 비단 낙태뿐 아니라 생명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행위로 콘돔을 사용하는 것조차 비윤리적인 일로 간주한다. 그러니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요즘 시대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나가면 숨쉬기도 힘들 지경!’이라는 한탄을 늘어놓기 십상이다. 그래서 까짓 것 하는 맘에 생명을 제 멋대로 지우려니 어쩐지 벌 받을까 무섭기는 하고. 아마 이런 게 요즘 그리스도인의 고민이라면 고민일 것이다.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교 윤리가 그렇게 엄격해진 이유를 흔히 타협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던 바울로 사도의 전도원칙에서 찾곤 한다. 예를 들어보자.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경고한 대로 이제 다시 경고 합니다. 이런 짓을 저지르는 사람은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갈라 5,17-21)

불의한 자는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불륜을 저지르는 자도, 우상을 숭배자도, 간음하는 자도, 남창 하는 자도, 비역하는 자도, 도둑도 탐욕을 부리는 자도 주정꾼도 중상꾼도 강도도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합니다.(1고린 6,9-10)

단 두 개의 본문을 예로 들었지만 우리는 바울로가 앞장세운 윤리의 엄격성을 쉽게 알 수 있다. 바울로의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따르면 전직 대통령이 즐겨 드셨다는 항아리 수제비 집을 물어물어 찾아가 그분의 입맛을 재현해 보는 일은 식탐에 해당하고, 친구들과 기분 좋게 한잔 하면서 소리 높여 합창이라도 하면 흥청대는 술판이 될 테고, 연쇄 살인범 기사를 읽고 ‘그런 놈은 당장 사형시켜야 돼!’라고 외치면 적개심의 표출이 될 것이다. 사도의 기준에 따르면 모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글러먹은 자들이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보다 더 엄격한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인 역사의 예수님은 바울로 보다 한 술 더 뜨는 느낌이다. 그분의 한마디 한마디에서 얼마나 찬바람이 불어 나오는지 터럭과 뼈마저 두려워 웅크릴 정도이다. 예수님은 탐욕의 눈길로 여자를 보았으면 눈알을 빼버릴 것이며, 엉큼한 욕정에 지하철 여성 전용 칸에서 손을 함부로 놀렸으면 그 손목을 잘라버리고, 죄를 지는 경우 물에서 떠오르지 못하도록 연자 맷돌을 목에 감고 자살하라고 강요했으며, 형제에게 미움을 가져 ‘바보’라는 말 한마디만 던져도 지옥에 갈 것임을 공언했다. 최소한 바울로는 죄의 종류나 개념을 정해주기라도 했지만 예수님은 그에 비해 훨씬 직설적이고 즉흥적이다. 만일 예수님의 윤리지침을 곧이곧대로 따르면 모든 성당 앞에는 작두나 불에 달군 집게를 마련해 두어야 할 것이고, 한강 다리는 목에 맷돌을 단 그리스도인으로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며, 지옥 불에 떨어지는 게 두려워 말 한마디도 자유롭게 못할 것이다.

죄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예수님은 바울로와 차이가 난다. 바울로는 ‘죄지은 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짤막한 언술로 냉정하게 상황을 정리한 반면, 예수님은 심금을 울리는 묘사를 즐겨하신다.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꼬집으시면서 하신 말씀을 예로 들어보자.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너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지옥 형 판결을 어떻게 피하려느냐?……..그리하여 너희는 의인 아벨의 피부터, 너희가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한 베레크야의 아들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땅에 쏟아진 무죄한 피의 값이 모두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모든 것이 이 세대에 닥칠 것이다.(마태 23,29-36)

만일 정면에서 이 말씀을 들었던 바리사이나 율사가 있었다면 예수님의 현장감 넘치는 표현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극도의 공포와 함께 분노가 치밀어 올랐을 테니 말이다. 이 정도면 바울로의 윤리지침은 오히려 상당히 점잖은 편에 속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느님을 두려워하시오.

이제 한 걸음 물러나 살펴보도록 하자. 바울로가 제시한 윤리 목록들은 스토아학파의 그것과 많이 닮았다. 스토아학파에서는 우주를 움직여 나가는 거대한 질서를 상정했고 그 질서를 세계 내에 구현함에 있어 금욕과 절제가 기준이 된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금욕과 절제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목표인 셈이다. 그렇게 목표에 도달하려 매진하는 인간은 저절로 독립적인 자아가 형성되어 내적 평안을 획득하고 정신의 자유를 맛본다. 심지어 육체의 자유가 저당 잡힌 노예라 할지라도 정신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마침 바울로의 출생지가 동방지역(오리엔트)의 스토아학파 본산지였던 타르수스였으니 그가 받았을 영향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저런 윤리 목록들은 줄지어 나열하는 품이 스토아의 학풍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바울로가 제시한 윤리의 바탕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떠한가? 무엇이 예수님에게 그렇게 즉흥적이고 표현적이고 직설적인 윤리를 선포하게 만들었을까? 예수님이 나시고 자랐던 이스라엘의 유대교는 율법에 기반을 둔 종교라 윤리에서도 각 사안마다 그에 걸 맞는 답을 제시하는 전통을 갖고 있다. 이른바 결의론決疑論적인 사고방식이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되갚으면 그뿐이지 따로 공들여 해결책을 강구할 필요가 없는 게 유대 율법의 특징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윤리 지침을 보면 사안의 특수성에 따라 각각의 경우를 세밀히 따지기는커녕 일관된 원칙마저 없어 보인다. 다짜고짜 눈부터 뽑으라는 식 아닌가! 그러니 과연 어느 사람이 그런 가르침을 따를 수 있을까?

예수님이 제시한 윤리지침의 유일한 기준은 하느님이다. 인간의 법과 인간의 눈엔 허점이 많아 얼마든지 속여 넘길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련한 위선자라도 모든 일을 아시는 하느님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혹 사람 눈을 피해 절묘하게 팔등신 여인을 훔쳐보았다 하더라도 하느님은 그 흉물스런 감정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아시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구체적으로 몸을 섞는 ‘불륜’을 탓하기에 앞서 마음을 혼탁하게 만드는 ‘음욕’부터 다스려야 마땅하다.

하느님의 윤리

바울로는 스토아학풍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윤리지침을 제시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몰랐다거나 예수님의 윤리지침을 오해했다고 서둘러 결론내릴 필요는 없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자신의 사상적인 틀에 맞추어 해석했을 뿐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는데, ‘모든 윤리는 하느님을 상대해야 한다.’는 원칙에서 바울로가 약간 비켜서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로는 인간의 상식에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하느님의 윤리를 재설정했다. 이를 두고 하느님보다 사람 눈치를 우선 보았다고 말하면 과장 섞인 표현이 될까?

때로는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게 우리네 약한 인간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한 때 청와대 인사팀에서 ‘위장전입이나 가벼운 투기 정도는 있을 수 있다, 그보다는 업무 수행 능력이 중요하다’는 식의 선발 원칙을 가졌다고 한다. ‘공정사회’의 깃발이 온 나라에 나부끼기 전 이야기다. 그런데 다른 한쪽에선 이번 인물은 지역 안배를 해서 선발했으니 지난번 청문회 때처럼 너무 박하게 굴지 말아달라는 은밀한 거래가 오고갔다는 후문도 들린다. 역시 약한 게 인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장 전입한 사실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슬쩍 넘어가 줄 수 있으나 하느님 앞에서는 결코 지울 수 없는 흔적이 생겼기 때문이다.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하느님은 속일 수 없다. 혹시 독자 분들 중에서 총리 하마평에 오르내리는 분이 있다면 이 점 명심하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