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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가치 : 신뢰 – 동두천나눔교회 김현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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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가치 : 신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아멘.

 

차를 운전하다보면 중앙분리대가 있는 도로와 그것이 없는 도로를 달리게 됩니다. 고속주행일 때 중앙분리대가 있는 곳은 나름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지만 중앙분리대가 없는 도로에서는 간혹 두려울 때가 많습니다. 특히 밤에 운전할 때면 맞은편에서 오는 차가 중앙선을 넘어오지는 않을까 하고 걱정을 하며 운전을 할 때가 있습니다. 실제 교통사고의 사례를 보면, 중앙선을 침범하여 사고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습니다. 도로의 중앙선은 양방향 차량들이 넘어가서는 안 되는 선으로 도로교통 법규로 규정된 약속입니다. 이것을 지키겠다는 약속이 있을 때 우리는 면허증을 발부합니다. 나는 물론이고 타인도 이를 지킬 것이라는 신뢰가 있기에 우리는 도로 위를 주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신뢰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어찌하겠습니까? 독일에 가면 아우토반이란 도로가 있는데, 그곳에서의 주행속도는 무제한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 도로를 이용하는 사람은 누구나 교통법규에 따른 약속을 잘 지킬 것이라는 신뢰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할 것입니다. 이러한 신뢰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겠지요.

 

요즘 뉴스를 보니, 우리나라 정치계에서 30,000불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방법대로 하면 30,000불의 시대를 앞당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한 정치인은 노동계의 과격한 행동이 30,000불 시대로의 진입을 가로막고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노동계가 재계의 말을 잘 따르면 30,000불의 시대로 접어들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발언은 오히려 30,000불의 시대로 나아가는 데 있어 저해요인이 될 것만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주요문제, 즉 불신과 분열현상을 더욱 심화시키는 발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하튼 대부분 경제학자들은 우리의 경제적 조건이 30,000불이 되면 그 때 비로소 우리가 선진국에 이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주장이 있습니다.

 

미국 스탠퍼드대 정치학 교수인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그의 책 [트러스트]에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코리아가 선진국에 이르기 위해서 꼭 전제되어야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신뢰이다.’ 신뢰라는 사회적 기반이 갖춰질 때라야 비로소 우리가 30,000불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신뢰라는 보이지 않는 가치를 부를 창출하는 사회적 기반이라고 주장합니다. 신뢰는 서로에 대한 약속을 이행할 것이라는 믿음을 만들기 때문에 분업과 협동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진국이라 부르는 사회들은 이러한 신뢰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신뢰가 약한 나라일수록 서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분업과 협동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결국 사회적 빈곤을 양산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신뢰가 약한 사회에서 구성원들은 늘 자신이 이용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심리적 저항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안전장치를 만드는데 과다한 비용을 지불하게 됩니다. 우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남과 북이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다보니 과다한 국방비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국방비를 사회에 투자한다면, 아마도 30,000불의 시대는 성큼 눈앞에 다가올 것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사역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방인 여인의 딸을 고치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귀먹은 반벙어리를 역시 고치시는 이야기입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딸은 악령이 들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를 찾아와 간청하기를 자신의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는 빵을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이방인들에게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다는 표현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여기서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선생님, 그렇긴 합니다만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 참으로 이 여인의 믿음은 대단합니다. 그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녀의 딸을 고쳐주십니다. 그 여인이 보여준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였습니다. 그 신뢰가 그녀의 딸을 고치게 했던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병고침에 있어 가장 전제가 되는 것은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내 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그 어떠한 의사의 처방도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환우와 의사간에 두터운 신뢰가 있을 때 비로소 치유의 과정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신뢰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신뢰의 근원에 대한 질문과도 같습니다. 성경은 그 근원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가 아담 이후로부터 죄를 지어 타락했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형상(Image of God)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의 씨앗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장애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든, 부도덕한 존재이든, 죽을죄를 지은 존재라 하더라도 그 존재는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요, 그 안에는 하느님의 씨앗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우리는 누구나 사랑받을만한 존재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진리입니다. 하느님이 친히 인간이 되셨다는 성육신의 사건에서도 우리는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인간을 벌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벌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려 했던 구원역사에서도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라는 의미도 이와 상통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들의 형제자매들 모습에서 하느님의 형상, 하느님의 씨앗을 찾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까? 우리는 타인의 결점부터 보려고 하지 그 안에 숨겨진 본모습은 좀처럼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하느님의 본모습을 찾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를 구분 짓고 편을 나누고 벽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갈라진 부분을 하나로 화합하기 위해서는 용서와 화해의 과정이 요청되는데, 이 또한 서로의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형상을 보지 않는 한 불가능합니다.

 

신뢰가 깨진 사회, 신뢰가 약한 사회에서는 결국 약자들이 희생되기 마련입니다. 강자들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그러나 힘이 없는 이들은 어찌되겠습니까? 시리아 난민들의 고통을 호소하는 메시지들이 SNS를 타고 전 세계에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자유를 찾아 고국을 등졌으나 갈 곳이 없습니다. 그 어디도 그들을 맞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교회의 존재이유를 물어야 합니다. 왜 교회가 존재합니까? 교회란 어떤 곳입니까? 교회란 하느님과의 전적인 신뢰를 경험한 자들의 증언공동체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신뢰를 기반으로 이웃들과 전적인 신뢰를 형성해가는 신뢰공동체입니다. 오늘 야고보서는 이를 잘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신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우하지 마십시오. … 차별을 두고 사람을 대우한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고 여러분은 계명을 어기는 사람으로 판정됩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을 준수하라고 야고보서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강조했던 야고보서의 말씀을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신뢰하는 삶, 신뢰받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우선은 내 안의 하느님의 형상을 찾아야 합니다. 내 안의 하느님의 씨앗을 느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모든 존재 안에 있는 하느님의 이미지, 씨앗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태도를 닮아가고자 하는 노력과 상응합니다.

 

지난 금요일에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다가 JTBC에서 방영했던 히든싱어라는 프로를 보았습니다. 한 명의 진짜 가수와 나머지는 그 가수의 노래를 모창하는 이들이 등장합니다. 청중은 이들 중 진짜 가수를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쉽지 않았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실제 가수보다 모창가수가 노래를 더 잘 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가수와 목소리가 똑같고 심지어 외모나 동작이 너무나 닮았을 때, 그것을 지켜본 사람들은 물론이고 가수 본인도 심히 놀라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큰 기쁨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태도를 닮는다면, 우리가 우리 안의 하느님 형상을 발견하고 밖으로 끄집어낸다면 틀림없이 우리 이웃들은 물론이거니와 하느님도 크게 기뻐하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우리는 타인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형상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이 그러할 때입니다. 신뢰가 약해지고 있는 이 때, 우리 교회는 진정 신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증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먼저 서로 신뢰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지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