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말씀과 신앙나눔 헤롯을 피해 가라(성탄후 1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헤롯을 피해 가라(성탄후 1주일, 최도미닉 신부 말씀)

283
0
공유

(성탄후 1주일)/ 이사63:7-9, 히브2:10-18, 마태2:13-23

헤롯을 피해 가라

 

요즘 가정 사목으로 유명한 송길원 목사님이 쓴 “가정을 허무는 여우를 잡아라.”라는 책을 보면,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여우를 잡아내야 한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 여우를 변질된 가치관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생각에 따라서 행동합니다. 따라서 생각이 바뀌면 삶이 바뀌고, 삶이 바뀌면 운명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가정을 만들려면 가정을 병들게 하는 병든 생각, 병든 가치관을 잡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우를 잡아내야 하는 것, 어디 가정뿐이겠습니까?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강한 철이라고 하더라도 녹은 그 철은 좀먹어 못쓰게 하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을 허무는 좀과 녹이 있습니다. 바로 헤롯의 누룩입니다. 헤롯의 가치관, 헤롯의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헤롯의 이 변질된 가치관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피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지금 헤롯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하니 헤롯을 피해 에집트로 피신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살리기 위해 헤롯이란 사람을 피해야만 하는 운명, 어쩌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우리들을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뽑아 준”(에페1:4)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와 함께 살려면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피해야 할 것은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요셉은 예수의 탄생을 기뻐할 사이도 없이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 헤롯을 피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헤롯의 유일한 목표가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것처럼 예수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믿음의 형제들을 공경합니다. 이 공격은 정말 만만치 않습니다. 마치 우는 사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배고픈 사자는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헤롯의 실체를 알고 그 누룩을 조심해야 합니다.

 

첫째, 헤롯은 진리를 두려워했던 자입니다.

요한은 헤롯에게 진리를 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헤롯의 잘못된 행실도 지적해 주었습니다. 사실 헤롯은 요한의 말을 옳다고 여겼고, 때문에 두려워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헤롯은 그 말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요한을 증오했고, 결국은 처형시켜버렸습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남이 나에게 하는 충고를 기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충고를 미워하고 증오하면 헤롯의 덧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내 주변을 관심 있게 보십시오. 참 된 삶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소리에 대하여 마음을 열고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가장 소중한 사람들은 제가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충고해주는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둘째, 헤롯은 이중 인격자였습니다.

겉으로 자비한 체 하지만 속으로 융악한 자였습니다. 동방박사가 그를 찾아왔을 때 그는 자기에게도 아기가 태어난 곳을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경배하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잡아 죽이려는 마음을 품고 그랬던 것입니다.

이처럼 겉과 속이 다르게 되면 헤롯의 덧에 걸리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말과 행동이 일치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못하면 신뢰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교회와 가정, 교회와 직장이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어디에서 있든지 교인은 진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으로의 삶과 품위를 지켜 갈 수 있습니다. “때로는 사랑이란 말보다 진실이란 말이 더 필요할 때가 있다”는 말을 한 시인이 있습니다. 동감하는 말입니다. 진실해야 합니다.

 

셋째, 이기적 야심에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헤롯은 권력을 잡기 위하여 자기의 아내와 세 아들 그리고 장모와 처남, 삼촌까지 죽인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했던 사람입니다. 바로 이기적 야심 때문입니다. 이기심은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그리고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그리고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죄악 중에서 탐욕보다 더 큰 죄악은 없고, 재앙 중에서도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이 없으며, 허물 중에서도 욕망을 채우려는 것보다 더 큰 허물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전도서를 보면 “아무리 지혜로워도 탐욕을 내면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전도7:7)라고 했습니다. 이기적인 욕심은 사람을 마음을 어리석게 하고, 어둡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기적인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기적인 마음은 비교하는 데서 옵니다. 다른 것과 비교해서 자기의 몫을 챙기려할 때 이기심이 발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비교는 우월감을 만들어 교만하게 하거나 아니면 열등감을 만들게 되어 자기 비하를 만듭니다.

 

저는 교회를 지탱하는 가장 큰 가치관을 들라면 바로 나눔과 섬김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눔과 섬김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기심은 이런 나눔과 섬김의 삶을 송두리째 허물어 버립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값없이 주신 은혜로 살아간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하느님은 우리의 생명을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일수록 우리는 값없이 주십니다. 우리가 숨 쉬는 공기, 아름다운 산천, 우리가 마시는 물, 이 모든 것에 대가를 메긴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소중한 것이기에 거저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모든 것을 값없이 거저 주시고, 우리를 아들처럼 여기시고 섬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께서 값없이 주신 것을 서로 나누며 섬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빚 진자입니다.” 그래서 자랑할 것도, 주장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에게 무슨 보수가 있겠습니까. 있다면 그것은 내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응당 받을 수 있는 것을 요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이름도 값도 없이 드리는 나눔과 섬김은 아름답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됩니다.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희생과 봉사도 이기심이 들어가면 쇠가 녹이 슬듯이 그 때부터 변질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느님의 능력을 행사하셔서 우리를 치유하실 때, 대가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진리를 가르치실 때 대가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생명까지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분의 일을 하면서 무엇을 자랑하고, 무엇을 대가로 바라겠습니까? 때문에 사도 바울은 믿는 사람은 먼저 이기적인 야심을 버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1디모2:18)

넷째,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타락한 사람입니다.

헤롯은 자기의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 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동생 부인이 아름다워도 동생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비도덕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도 알고 자신도 아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세상도 알고 자신도 아는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삶은 우리의 믿음을 단번에 허물어버립니다.

토인비는 로마의 멸망한 이유는 외부의 적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니라 내부의 적에 의해 멸망했다고 합니다. 내부의 적은 바로 쾌락과 성적 문란, 그리고 부정과 부패입니다. 성도가 도덕과 윤리적이 균형을 잃게 되면 자연히 그 믿음도 병들게 됩니다.

 

요즘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 발전하니까 등장하는 사탄은 바로 쾌락과 욕정과 편리함이란 사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사슬에 걸리지 않도록 긴장해야 합니다. 얼마 전 한 당 대표가 요즘은 자연산을 좋아한다는 여성 비하 발언을 했다가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게 지도자란 사람이 할 말입니까? 그런데 슬프게도 이것이 지금 우리의 수준입니다.

이런 헤롯의 정신은 언제나 우리의 믿음을 쓰러트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간교한 사탄의 계획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믿음이 굳게 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요셉은 이와 같은 헤롯의 사슬을 피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우리가 어떻게 헤롯을 피해 아기 예수를 지킬 수 있는지 가르쳐 줍니다.

요셉이 헤롯을 피해 갈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요셉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편안한 길을 택했더라면 예수님은 헤롯의 손에 죽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말하기를 우리 모두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어서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다”(에페1:13)다고 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순종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떤 때는 순종하시고 어떤 때는 거절 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은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겠다고 순종하셨고, 그리고 그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면서도 순종하셨습니다. 이런 순종만이 헤롯의 계획을 이길 수 있습니다. 순종하는 신앙만이 주님과 더불어 사는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천사를 시켜 요셉에게 에집트로 가라고 했습니다. 에집트로 간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어린 아기와 아내를 데리고 이방인이 살고 있는 땅으로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요셉은 순종했습니다.

천사의 말대로 가라하면 갔고, 오라 하면 왔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아내로 삼으라고 하면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처지나 상황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보기에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 좋은 일이라면 그것을 선택하십시오. 이것이 순종입니다. 이 순종만이 내 마음속에 계신 주님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마치 하와가 뱀의 간사한 꾐에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미혹되어 생각이 변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순결을 저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이 된다.”(2고린11:3)고 했습니다. 뱀의 간사한 꾀임, 바로 헤롯의 계략입니다. 이 계략과 싸워 이겨내십시오.

헤롯은 2천 년 전에 존재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밖에 도 있고 내 안에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헤롯과 싸우도록 명령받은 사람들입니다. 요셉이 주님을 지키기 위해 헤롯의 공격을 이겨낸 것처럼 우리도 헤롯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