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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적 충고(분당교회 장기용요한 신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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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적 충고

‘위장된 평화’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매너 좋게 그리고 웃으면서 인사하고 서로 사랑한다는 말도 하면서도 상대방의 생각과 가치관에 대해서는 모르고 지내는 경우입니다. 설사 안다고 해도 미움과 증오는 감추어 둔 채로 갈등을 회피합니다. 겉으로 보면 신사적이고 화목한 것 같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위장된 것일 뿐이고 갈등이 표출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서로가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상대방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받아들일 마음도 없으면서 ‘공동체’, ‘사랑’, ‘평화’라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면 그것은 위장된 평화에 불과합니다.

충고를 할 수 없는 공동체는 공동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의 잘못에 대해서 지적하고 바로 잡을 수 있어야 진정한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막상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가 누구를 지적한다는 일은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자칫 자신의 우월감과 교만함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누가 누구에게 충고하고 용서할 자격이 있을까요? 가끔 충고라는 것을 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태도를 강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상대방을 지배하거나 소유하려는 태도이기에 더욱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적인 충고를 하라고 하십니다. 아마도 ‘위장된 평화’를 경계하고 진실 된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서로가 쓰디 쓴 약이지만 처방을 내려야 한다는 뜻일 것 같습니다. 비록 어려운 일이지만 사랑을 한다면 그리 해야 될 것입니다. 부모님들이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충고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충고에는 쌍방 통행의 대화가 필수적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권위나 권력에 의한 생각과 판단의 강요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특히 윗사람들이 아랫사람들을 타이를 때, 충고를 들어야 하는 입장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고 그 입장으로 들어가 볼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정죄는 무척 쉽게 이루어지고 용서와 형제적 충고는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특히나 세대 갈등, 이념 갈등,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일수록 진정한 충고와 역지사지의 태도는 찾아 볼 수가 없고 무자비한 공격을 퍼붓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한민국 사회는 충고하기도 쉽지 않고 충고를 받아들일 줄 모르는 사회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논어에 행정과 형벌로 다스리면 백성들이 수치를 모르고 예와 덕으로 다스리면 부끄러움을 안다고 했습니다. 덕으로 이끌고 예로 질서를 세우면 부끄러움도 알고 질서도 바로 서게 되지만, 정형(政刑)으로 다스리면 형벌을 면하려고만 할 뿐이며 설사 법을 어기더라도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통순경이 교통법규를 위반한 차량을 적발해서 벌금 딱지를 떼게 되면 운전자들은 대부분 재수 없이 걸렸다는 생각을 합니다. 자신의 반성보다는 적발한 사람을 원망하고 운이 없는 것을 한탄합니다. 이와 같은 경우는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겸손함의 미덕이 사라지고 치열한 경쟁 구조 속에서 남들보다 앞서 가야만 하고, 남들 보다 더 행복해 보여야 하고, 남들 보다 더 윗자리에 가야만 성공한 인생이라고 여겨지는 사회에서 진심어린 충고가 먹혀들어갈 마음의 자리가 상실되어 갑니다. 잘못한 사람 스스로 수치는 깨닫고 반성하기 보다는 네가 뭔데 충고를 하느냐고 오히려 삿대질을 하는 강퍅한 마음에 형제적 사랑이 스며들 곳이 없습니다.

아마도 참다운 형제적 충고가 이루어지려면 내가 입으로만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잘못을 내가 대신 짊어지고 속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짊어지시면서 그렇게 우리에게 충고하셨습니다. 이를 믿는 사람은 스스로 회개함으로서 이 땅에서 매인 것을 풀어갑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9월 7 연중 23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