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말씀과 신앙나눔 10월 20일(연중 29주일) 강릉교회 설교문

10월 20일(연중 29주일) 강릉교회 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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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 속 예수님의 이야기에 한 과부가 등장합니다. 그녀는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그 억울함을 풀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재판관을 찾아가 자신의 억울함을 끊임없이 하소연합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오랫동안 그녀의 하소연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공동번역에서는 “고약한”으로 다른 번역에서는 “불의한”으로 묘사된) 재판관이 결국 자신의 불편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의 청을 들어줍니다.
    
2천년 전 먼 팔레스타인 땅에서 행해진 이 비유 속의 상황이 낯설지만은 않습니다. 오늘도 이 땅에는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상황보다 더 비참하게도 그 누구도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 억울함이 사소해서도 아니고, 그의 하소연이 짧아서도 아닙니다. 억울하게 생명을 잃은 많은 사람들, 억울하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 억울하게 자신의 삶의 터전을 빼앗긴 사람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죄인으로 살아야 했던 사람들… 억울한 이들의 울부짖음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 뿐이 아닙니다. 단지 장애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단지 태어난 고향이 그곳이어서,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차별과 억울한 일들이 날마다 행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시대의 사회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이 가르침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수용하는데 그 해석은 천차만별입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가르침을 개인적이고 영적인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개인의 영역으로 제한하고(그저 개인의 소망이나 욕망을 하느님께 전하는 것으로 축소해버리는 것), 마치 있지도 않은 세계와 분리된 영적세계로 전환시켜 버립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기도는 늘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방식으로 행해지며, 결코 삶의 자리와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기도는 늘 말로 끝날 수밖에 없고, 수동적이고 스스로 전혀 책임지지 못하는 의존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의 특징은 최근에 생긴 것입니다. 기독교의 오랜 전통에서는 결코 신앙을 개인의 측면에 국한하지도 않았으며, 기도를 특정한 의식으로 제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는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지향이며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믿는 이들의 모든 행위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기도는 결코 말로 끝날 수 없고 반드시 삶의 자리에서 드러나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사적인 것이 아닌 공적인 행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타락이 인간 개인 뿐 아니라 인간 사회의 모든 구조를 왜곡시켰기 때문에 개인의 잘못을 해결 할 뿐 아니라 이를 넘어 사회구조로 구현된 죄의 문제를 철저하게 다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한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이 땅에 하느님의 통치를 선포하는 일입니다. 불의로 인해 생겨나는 억울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고통에 함께 참여하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기도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끌어오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위대한 결단을 하고, 하느님 앞에 우리의 삶을 내어 드리며, 예수님의 뒤를 따라 십자가와 섬김의 길을 가는 그러한 기도의 삶을 살게 될 때, 마치 모든 일이 성공할 것처럼, 우리의 뜻대로 될 것처럼 여겨지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악인들의 삶은 더욱 풍성해 지고, 정의는 사라지고 불의가 판을 치며,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의 문제가 우리의 삶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현실의 벽 앞에서 실망하거나 낙심하게 되고 맙니다.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바로 그 때에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볼 수 없는 그 믿음은 바로 이러한 믿는 이들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포기하지 말고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계속 기도의 삶을 살아라. 하느님을 신뢰하며 정의를 행하는 삶을 멈추지 말라.”고 우리를 격려해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불의한 재판관과는 달리 하느님께서 지체하지 않고 올바른 판단 곧 심판을 내려 주십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머나먼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곳에서 매순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될 때, 우리는 약속대로 하느님의 나라 상속자가 될 것이며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는 평화의 상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인간은 평등과 다양성이 조화를 이루는 상태, 즉 모든 사람이 나름대로 독특하게 기역하고 공동생활의 풍성함을 즐길 수 있는 사회에 살며 자기를 실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은 그 어느 때보다 가난과 불평등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성공과 풍요로움 그리고 이 말들을 대변하는 돈이라는 가치 앞에 수많은 억울한 외침이 묻히고 사라지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회의 불의를 알아차리기 보다는 오히려 경쟁과 풍요라는 말에 갇혀서 이러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삶 뿐 아니라 이웃과 세상의 삶을 파괴하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하느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올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구합니다. 올바로 들을 수 있는 귀를 구합니다. 본질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구합니다. 그리고 더불어 두려움을 이겨내고 진리와 정의를 향해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는 용기를 구합니다.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
    
1946년 마틴 니묄러
    
“(독일에서) 그들이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 . 그들이 내게 왔을 때 . . .
그때는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 줄 이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