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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개혁하는 교회 – 크랜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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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개혁하는 교회 – 크랜머까지
 

* 본 내용은 대한성공회출판부에서 1998년 5월 발행한 책 <우리 믿음 바로 알기(김진만 저)>입니다. 게시를 허락해준 대한성공회출판부에 감사드립니다.

 

영어로 개혁 교회(리폼드 쳐치)라고 하면 칼빈의 제네바 교회를 위시한 대륙의 개혁 교회와 영어를 쓰는 나라, 즉 영국과 미국의 장로 교회를 가리킨다. 영국이나 미국 장로교의 선교로 탄생한 교회, 가령 한국의 장로교도 개혁 교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일부 침례 교회도 교리에서 개혁 교회의 흐름을 따른다고 한다.

성공회에도 자신들을 개혁 교회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소위 복음주의파의 일부이고 가톨릭파는 그것을 부인한다. 성공회를 장로교와 같은 개혁 교회라고 보기는 어렵다. 성공회는 개혁 교회가 아니고 ‘개혁하는 교회’—부단히 개혁하는 가톨릭교회라고 하는 것이 옳다.

중세 가톨릭 때에는 다른 나라에 앞서 교황에 맞서서 민족 교회의 기치를 들었고, 고대 영국 시절에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으며, 14세기의 위클리프와 같이 가톨릭교회의 기본 교리에 반기를 들고 교회 고위 성직자들의 부패를 고발하는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의 병폐를 개혁하려는 시도는 교황과 교회 지배층의 제동으로 좌절을 거듭했다. 헨리 8세의 수장권을 추종하기를 거부해서 처형을 당해서 가톨릭교회의 성인이 된 토마스 모아(1478-1535)도 친구 에라스무스와 함께 난마와 같이 흐트러진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열렬히 바라던 사람이었다. 그런 바램은 개혁을 주도했어야 할 자기의 임금에 의해서 저지되었고 그는 목숨마저 잃었다.

당시 대륙과의 무역항을 통해서 루터의 개신교 사상을 담은 서적이 영국으로 유입되었다. 후에 헨리의 대주교로서 영국 성공회 개혁의 주인공이 된 크랜머는 대학 시절에 학우들과 루터의 글을 읽고 루터 사상에 심취했었다. 대주교가 된 후에는 본격적으로 루터의 개혁 사상을 영국 교회에 도입하려고 힘썼다. 그러나 그 역시 구교의 교리와 관습의 유지를 고집하는 국왕에 의해서 저지되었다. 헨리의 뒤를 이은 에드워드 왕(1537-1553)의 짧은 치세 동안 크랜머와 그의 동조자들은 영국 교회를 개신교 쪽으로 개혁하는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영어 기도서를 냈고, 이단법을 철폐했으며, 루터의 아우구스부르그 고백을 주 내용으로 하는 교리 42 개조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 모든 개혁 움직임이 16세에 요절한 에드워드의 죽음과 그의 이복 누이 마리아의 등극으로 좌절되고, 크랜머는 옥스포드에서 화형을 당했다.

영국 교회를 다시 로마로 가져 갔던 마리아가 죽고(1558년) 엘리자베스가 여왕이 되었을 때, 영국민과 그들의 대표자의 모임인 국회는 결정적으로 개신교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이번에는 루터가 아니라 제네바의 칼빈 쪽이 우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