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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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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본 내용은 대한성공회출판부에서 1998년 5월 발행한 책 <우리 믿음 바로 알기(김진만 저)>입니다. 게시를 허락해준 대한성공회출판부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보는 십자가나 집이나 사무실 벽에 걸어 놓거나 책상 위에 놓아두는 십자가는 보통 고상 십자가이다. 나무나 쇠붙이로 만든, 이를테면 장식 없는 십자가가 아니고 십자가에 못 박혀서 사경을 헤매시는 예수님, 혹은 이미 숨을 거두신 예수님의 수난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조각이 붙어 있는 십자가—이것이 고상 십자가(영어로는 크루시픽스)이고, 한국 성공회와 천주교, 그리고 루터교가 고상 십자가를 쓴다.

서방 가톨릭교회에서는 15세기 이전부터 고상 십자가를 쓰기 시작하다가 종교 개혁이 일어난 16세기 이후 모든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쓰게 되었다. 성공회에서는 종교 개혁 이후에는 몇몇 특별한 교회(가령 엘리자베스 여왕 기도소)에서 쓰일 뿐, 그 자취를 감추었다가 19세기 중엽 소위 옥스퍼드 운동의 영향으로 성공회 안에서도 널리 쓰이게 되었다. 옥스퍼드 운동은 영국 성공회 안에서 일어난 가톨릭부활 운동이었다. 우리 한국 성공회는 그 운동의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이 와서 시작한 교회이므로 처음부터 보통 십자가가 아닌 고상 십자가를 고집해 왔다.

동방 정교회는 부활에 초점을 두기 때문에 수난하시는 예수상을 볼 수 없는 십자가를 쓰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물론 정교회는 수난하시는 예수님 대신에 정교회 특유의 아이컨이라고 하는 성화상을 십자가에 붙여서 쓰는 관습이 있다. 초대 교회 때는 고상이나 아이컨을 십자가에 붙이는 법이 없었다. 제대 위에는 아무 것도 놓지 않았다. 한편, 서방 교회는 예수님의 수난을 강조한 나머지 십자가에 달려서 신음하시고 괴로워 하시는 예수님, 그리고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예수님의 상을 매우 박진감 있게 조각해서 십자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제대 위에 놓기도 하고, 천장에다 매달아서 제대 앞에다 떨어뜨리곤 했다.

전통적으로 주교들이 십자가가 달린 목걸이를 목에 건다. 또 수도자들도 십자 목걸이를 즐겨 걸고 다닌다. 자랑할 것은 십자가 밖에 없고, 마음과 목숨을 온전히 그리스도에게 바치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는 십자가를 항상 몸에 지니고 산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묵주 신공을 드리는 사람들에게 묵주에 달려 있는 십자가가 특별히 은혜로울 수 있다.

십자가는 어차피 상징물에 불과하다. 중세 교회는 십자가를 공경하는 갖가지 행사와 축제를 마련했고, 십자가에 관련된 축일도 여러 날이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십자가를 공경하는 나머지, 십자가에 무슨 신령한 힘이 있는 것처럼 다루는 것은 미신이고 우상 숭배이다. 성공회 교회가 반드시 천주교 성물점에서 구하거나 특별 주문해서 고상 십자가를 사다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고상 십자가가 아닌 보통 십자가를 제단 뒤에 걸고 예배를 보는 성공회 교회가 있다. 제단에 자그마한, 아무 장식이 없는 나무 십자가를 놓고 성찬식을 드리는 교회도 있다.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더 큰 상징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쇠붙이 십자가도 좋지만, 아무 장식이 없는 나무 십자가가 더욱 아름다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