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100문 100답 70. 옥스포드 운동 – 가톨릭 부흥 운동

70. 옥스포드 운동 – 가톨릭 부흥 운동

1053
0
공유

옥스포드 운동 – 가톨릭 부흥 운동

본 내용은 대한성공회출판부에서 1998년 5월 발행한 책 <우리 믿음 바로 알기(김진만 저)>입니다. 게시를 허락해준 대한성공회출판부에 감사드립니다.

엄청난 침체의 늪 속에서 헤매던 18세기의 영국 교회에 신선한 쇄신 바람을 일으킨 것이 존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이었다. 19세기 중반에 옥스포드의 몇 젊은 교사들이 일으킨 가톨릭부흥 운동은 가톨릭해방(1829), 자유주의의 팽배, 그리고 교세의 쇠퇴 등으로 갈팡질팡하고 있던 영국 교회에 충격과 변혁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 영향은 현재까지도, 비단 영국 성공회뿐 아니라 세계 성공회에서, 특히 한국 성공회와 같은 가톨릭전통이 강한 교회에서 뚜렷하게 살아 있다.

가톨릭해방은 엘리자베스 시대 이래 300여년 동안 가톨릭교 신봉자라고 해서 대학과 군대에 들어가지 못하고 공무원을 위시해서 일체의 공직에서 배제되었던 사람들을 해방시켜 준 것이다. 거기다가 당시의 정권은 교회 개혁법을 통과 시켜서(1832) 애란의 성공회 교구 열 개를 폐지하는 대 사건이 일어나서 성공회 교인들이 대거 가톨릭쪽으로 옮겨가지 않을까 하고 우려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하에 1833년 7월 14일, 오리엘 칼래지의 교사이던 존 키블이 대학 교회에서 ‘국가적 배교’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서 애란 교구 폐쇄 정책을 맹렬히 공격했다. 이것을 보통 옥스포드 운동의 시작으로, 그 운동에 지도적 역할을 했던 사람들과 그 운동의 주역인 존 뉴먼(1801-90, 후에 추기경)이 성공회를 떠나서 로마 교회로 넘어간 1845년을 그 끝으로 본다.

옥스포드 운동의 주역을 대체로 뉴먼, 키블, 그리고 에드워드 퓨지(1800-82) 세 사람으로 본다. 뉴먼은 로마로 넘어 갔고, 나머지 두 사람은 성공회를 지켰다. 그 사람들이 추진한 운동의 목적은 1) 영국 성공회가 하느님이 세우신 교회이며, 2)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라는 것과, 3) 영국 공도문을 믿음의 규범으로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뉴먼이 1833년에 낸 논문을 필두로 소책자를 발간했다. 소책자로 주장을 펴서 ‘소책자 운동’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 중에는 상당수의 친로마 교회파가 끼어 있었고, 그들 때문에 옥스포드 운동이 성공회 안에서의 가톨릭부활이 아니라 로마 교회로의 복귀를 부추기는 운동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서 뉴먼이 소책자 제 90호를 내고, 영국 교회의 신조 39개조가 로마 교회의 교리와 상치하지 않는다는 논설을 펴자 그의 장상 옥스포드 주교를 위시해서 여러 주교들과 옥스포드 교구의 성직자회가 뉴먼을 단죄하여 소책자는 90호로 막을 내리고, 뉴먼은 리틀모아로 물러갔다. 그 후 뉴먼은 로마 교회로 넘어갔다.

그러나 그 운동의 여파는 언론과 정부와 대다수 주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널리 퍼져갔다. 그 운동의 영향은 특히 교회의 예전과 예식에서 두드러지게 되고 온 성공회에 파급되었다. 옥스포드 운동가들은 성직, 특히 주교직의 책임과 존엄성을 강조했다. 그 운동은 17세기의 고교회주의자들의 후예들의 운동으로 볼 수 있었다. 옥스포드 운동은 단지 예전 운동으로 그치지 않고, 헨리 8세 때 절단이 난 수도회를 부활시키고, 빈민 선교와 같은 사회적 관심도 고취시켰다. 그 운동의 한 과실로 1890년에 한국 성공회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