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말씀과 신앙나눔 8월 9일 평화통일기도주일… 김현호신부(성공회동두천나눔교회) : 퍼온 글

8월 9일 평화통일기도주일… 김현호신부(성공회동두천나눔교회) : 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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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통일의 영광을 누릴 것인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아멘.

 

오늘은 세계교회가 이 땅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해 함께 기도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계의 아픔을 위해 함께 기도해 왔듯이, 세계교회도 오늘만큼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며 마음을 모으고 있습니다. 분단 70년의 세월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혹자는 분단과 자신의 삶이 무슨 연관이 있겠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고자 노력해온 신앙의 눈으로 볼 때, 분단의 역사가 우리의 삶 깊숙이 연관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예로 병역의 의무를 들 수 있습니다. 군에 가지 않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다보니 병역비리라는 말까지 생겼습니다만, 만약 우리의 아들들이 이 땅에 태어나지 않고 일본이나 미국에 태어났다면 병역의 의무를 수행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과 북의 대치상황에서 이 땅의 남자들은 한번 쯤 총을 잡고 누군가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경험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온전하지 못한 광복 70주년, 하여 함께 이어진 분단 70년을 기억하며 파주 우물교회와 포천 나눔교회, 그리고 우리가 함께 이 민족의 치유와 화해를 위한 휴전선 순례를 지난 금요일부터 12일의 일정으로 진행하였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나이 드신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41명이 함께 해 주었습니다. 무더운 날씨였지만 모두가 정성을 모았습니다. 첫날 우리는 철원 소이산에 올랐습니다. 매우 더운 날씨였으나 절대 침묵하며 한걸음 한걸음 소이산을 올랐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저는 소이산에 오르면 항상 앉아 기도하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울림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제 자신이 마치 모압 땅 느보산 봉우리에 앉아 있는 모세와 같다는 생각이 엄습해 왔습니다.

 

신명기 34장의 말씀을 보면, 애굽땅에서 억압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온 모세가 하느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가나안 땅을 내려다보는 모세를 향해 야훼께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한 땅이다. 이렇게 너의 눈으로 보게는 해 준다마는, 너는 저리로 건너가지 못한다.” 출애굽의 역사에서 가장 주요한 역할을 한 모세는 끝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압 땅에서 죽고 맙니다. 물론 모세뿐만 아니라 출애굽할 당시의 제 1세대들도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됩니다. 그 다음세대들이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지요. 왜 주님께서는 모세와 1세대들에게 가나안 땅을 허락하지 않았을까요? 북녘 땅을 바라보며 과연 나는 통일된 시대를 볼 수 있는가?’하는 질문이 다가왔고 모세와 같이 그저 바라만 보다가 죽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주님은 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며칠이면 도달할 수 있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게 했을까요? 출애굽기에서부터 신명기에 이르기까지 성경을 읽어보면, 그 뜻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가 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준비가 덜 된 존재들은 결국 광야에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노예로 살았던 이들의 습성을 고칠 수 있는 시간을 주님은 부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습성을 고쳐나가는 일이 쉽지 않았나 봅니다. 40년의 세월이 흘어야 가능했고 다음세대가 되어서야 가능했습니다.

 

분단 70년을 맞이하며 자문해 봅니다. 이 세대들이 과연 통일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가 하고 자문해 봅니다. 제가 모세와 같은 처지가 된 듯한 연상을 한 것을 보면, 저도 어느덧 기성세대가 되었나 봅니다. 만년 청년일 줄 알았지만 저를 보고 청년이라 말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휴전선 순례의 마지막 예배는 참석자들 각자에게 3가지의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함께 나누는 시간으로 채워졌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나눔이 아주 귀하게 다가왔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나눔에는 꾸밈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희수의 나눔이 유독 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세 가지의 질문은 이렇습니다. “첫째, 나를 평화롭지 않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둘째, 나는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셋째, 통일은 나에게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희수의 답변은 이러했습니다. “ 나를 평화롭지 않게 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내가 평화를 위해 해야 하는 것은 기다림입니다. 그리고 내게 있어 통일은 기쁨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의 답변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답변하겠습니까?

 

분단 70년의 세월을 되돌아 볼 때, 전쟁을 경험한 세대이든, 그 이후에 태어난 세대이든, 이들이 지닌 습성들 중에 무엇이 가장 우리들의 평화를 깨뜨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희수의 답변에서 그 해답을 본 듯합니다. 그것은 바로 폭력성입니다. 우리가 순례를 하며 다니는 곳에 수많은 이들이 찾아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소위 안보관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걷고 있는 곳을 그들은 견학합니다. 그들이 그곳을 거쳐 가며 가지는 생각은 무엇일가요? 대부분이 적개심과 분노를 느끼고 갑니다. 전쟁을 일으킨 놈들은 나쁜 놈들이고 그들은 비난받고 처벌받아 마땅하고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힘을 키워야 한다. 하여 국방을 더욱 튼튼히 하고 군비강화에 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등의 생각을 가지고 돌아갑니다. 우리 안의 폭력성만을 더욱 키우는 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노예근성을 바꾸는데 광야 4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애굽땅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예근성은 오늘날 분단 7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는 어떠한 의미로 다가올까요? 저는 폭력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폭력적인 태도는 서로에 대한 증오를 증폭시킵니다. 독재를 용납합니다. 권위에 대한 복종을 강요합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신의와 같은 윤리의식은 언제나 흥정거리가 됩니다. 우리의 지난 70년이 이랬습니다. 그리고 저도 이러한 습성에 물들어 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하며 씨름하고 있는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죄의 고리를 단절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에 아비가 신포도를 먹으면, 아들의 이가 시큼해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포도를 먹은 것은 아비인데, 아들의 이가 시큼해진다는 말입니다. 오늘 구약말씀은 다윗과 그의 아들 압살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아의 아내를 탐했던 다윗에게 내려진 죄의 고리는 결국 그의 아들을 죽이는 일로 나타납니다. 아들이 자신의 권력의 자리를 탐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결국 그의 아들을 죽여 놓고 이렇게 한탄을 합니다. “내 자식 압살롬아, 내 자식아, 내 자식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이게 웬일이냐? 내 자식 압살롬아, 내 자식아하며 목 놓아 울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3129절로 30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날이 오면, ‘아비가 신포도를 먹으면, 아들의 이가 시큼해진다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리라. 죽을 사람은 죄지은 사람이다. 이가 시큼해질 사람은 신 포도를 먹은 그 사람이다.” 그날이 오면 더 이상 아들의 이가 시큼해질 이유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날이란 언제를 두고 하는 말씀일까요? 그 날이란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우리와 관계를 맺는 때를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그 날, 우리의 죄의 악순환 고리는 깨진다는 의미입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들어온 지 짧게는 150, 길게는 200년 이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태껏 죄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분단의 아픔, 전쟁의 아픔을 세대를 이어 전수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생명의 양식으로 여기지 않고 육의 양식으로 여겨왔기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가난한 탓에, 너무나도 상처가 많은 탓에 그저 우리가 예수님을 생명의 빵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만나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인 치유가 아닌 그저 항생제를 투여하며 일순간의 고통만을 잊어왔기 때문입니다. 늘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의 축복만을 애걸합니다. 우리의 폭력적인 삶의 태도를 바꿔달라는 기도 대신에 우리는 폭력적인 성향을 더욱 채우는 기도에만 매진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이웃들의 눈빛을 보십시오. 하나같이 매섭습니다. 살기가 등등합니다. 예수님을 닮은 모습, 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생명의 양식을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그 양식으로 새롭게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 온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답게 하느님을 닮으십시오.”

 

분단 70년의 역사를 더 이상 이어갈 수 없습니다. 제 세대가 통일의 영광을 누리지 않아도 좋습니다. 바라기는 제 다음 세대만큼은 통일의 기쁨을 누리도록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어떠한 준비입니까?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여호수아를 키웠듯이, 통일의 시대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은 키워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떻게 키워야 합니까? 그것은 폭력적인 태도가 아닌 참다운 평화를 품는 태도를 가르치는 것이요, 평화를 만들어가는 태도를 키우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을 닮은 모습이 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