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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존 웨슬리(1703-1791) – 감리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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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1703-1791) – 감리교

본 내용은 대한성공회출판부에서 1998년 5월 발행한 책 <우리 믿음 바로 알기(김진만 저)>입니다. 게시를 허락해준 대한성공회출판부에 감사드립니다.

존 웨슬리의 부친은 철저한 보수파 교인이었다. 그러나 조부와 외조부는 모두 청교도들이었다. 옥스포드를 나와서 부제로 일하다가, 1728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다시 옥스포드로 돌아갔다.

옥스포드에서는 동생 찰즈(1707-1788)가 일단의 학생들을 모아서 일종의 영성 운동을 벌이고 있었고, 주위로부터는 ‘거룩한 모임’(홀리 클럽)이라는 별명을 얻고 있었다. 존은 곧 이 그룹의 지도자가 되어서 기도하고, 희랍어 성경 공부를 하고, 자기 성찰에 몰두하는 한편 빈민 구제사업도 벌였다. 그러다가 1735년부터 약 3년간 해외 선교단체 SPG의 요청을 받아 미국 조지아로 가서 인디언들과 영국 식민자들을 교화시키는 일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허사로 끝났다.

웨슬리의 신앙 생활에서 특기할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미국으로 건너가는 도중에 만난 독일 모라비아 교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그리스도에로 회심을 한 것이다. 그 다음에는 런던에서의 모라비아 교인들의 집회에서 루터가 쓴 [로마서] 서문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동을 느낀 경험이었다. 그 후 존은 ‘나라와 특히 교회를 개혁하고 온 나라에 성경적 거룩함을 전파하기로’ 작정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실천적 종교를 촉진하는 것, 그리고 사람들의 영혼 속에 하느님의 생명을 심고, 보존하고, 증가시키는’ 일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그로부터 그의 거의 초인적인 설교 여행이 시작된다. 부리스톨의 킹즈우드에서 ‘들판에서의 낮설은 설교’로부터 시작해서 영국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거의 죽을 때까지 계속된 이 설교 운동에 수 많은 서민 군중들이 운집했다. 그의 인기는 선풍적이었고, 그의 정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18세기는 산업 혁명의 시대였고, 부익부 빈익빈의 매정한 사회가 형성되던 시대였으며, 계몽주의의 시대였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기성 교회는 선교의 초점을 잃고, 존이 사제로 속했던 영국 교회는 극도로 침체되고 기강이 해이하던 시대였다. 그 와중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외치는 존은 민중의 영웅이었다.

자신의 교회를 위시해서 모든 기성 교회들은 대중과는 반대로 존의 지나친 복음주의를 경계하고, 자신을 영국을 복음화하는 사도로 생각하는 그를 멀리했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은 점점 커져서 런던, 부리스톨, 뉴카슬 세 도시에 선교 단체를 조직하고, 나아가서 미국으로 설교자들을 보내게 되고, 1784년에는 그들을 감독할 사람으로 토마스 코우크를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국교인 영국 교회 밖에서 사실상 감리교(메소디스트)가 조직되게 되었다.

존 웨즐리는 끝까지 영국 교회를 떠나지 않고 교회의 사제직을 유지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성공회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을 지도할 인재들에게 사실상의 성직 안수를 줄 수 있었는가? 감리교의 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더 이상 국교 안에 남아 있기가 어려워졌을 때 ‘내가 영국 교회를 떠난 게 아니라 영국 교회가 나를 떠났다’라고 술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존 웨슬리는 영국 성공회가 낳은 위대한 설교자로, 복음 선교자로, 침체한 교회에 쇄신의 바람을 일으킨 사제로 길이 기억될 것이다. 감리교뿐 아니라 성공회로부터 추앙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