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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존 위클리프(?1329-1384)-‘종교개혁의 샛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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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위클리프(?1329-1384)-‘종교개혁의 샛별’

본 내용은 대한성공회출판부에서 1998년 5월 발행한 책 <우리 믿음 바로 알기(김진만 저)>입니다. 게시를 허락해준 대한성공회출판부에 감사드립니다.

위클리프는 영국 요크셔 출신으로 옥스포드를 다니고, 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는 신학 교사로 거의 한평생을 옥스포드와 인연을 맺고 살았다. 위클리프는 명석한 학자였고, 중세 스콜라 철학의 석학이었다. 위클리프는 단스 스코터스나 오캄과 같은 유명론자를 공격했다.

위클리프는 줄곧 교회의 비난과 단죄를 받고, 끝내는 그와 그의 추종자들이 옥스포드에서 쫓겨나는 비운을 맞았다. 라터워스라는 벽지 교회에서 죽기 2년 전의 일이었고, 그때에는 병을 앓는 환자였다. 당시 영국에서는 농민들의 반란(1481)이 일어나고, 로마와 아비뇽에 두 사람의 교황이 서로 대립해서 교회가 크게 분열하던 때여서 위클리프는 그런 난세에서 사면초가의 곤경을 겪었다.

위클리프는 당시의 실세였던 곤트의 존에게 중용되어서, 친정부 인물로, 이를테면 어용 학자로 간주되어서 교회의 빈축을 샀다. 영국은 로마 편에 섰지만 위클리프는 교황청으로부터 이렇다 할 벼슬을 받지 못했고, 아비뇽의 교황 쪽에도 그를 탐탁하게 생각할 이도 없었다. 정부 편을 들었지만 권력의 비호란 허망한 것이다. 그래서 사면 초가의 생애를 살았다. 위클리프는 남을 지배하는 주권은 은총에 달렸고, 은총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주권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농민의 반란을 고취했다고도 했지만, 실상 위클리프는 농민 반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위클리프를 ‘종교 개혁의 샛별’이라고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종교 개혁의 선봉이 루터였다면, 위클리프는 루터가 태어나기 150년 전에 태어 나서 루터가 품었던 것과 거의 같은 혁명적 개혁사상을 품고, 가르치고, 글로 써서 발표했다. 위클리프는 루터처럼 성경을 완역하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교회가 금하는 것을 알고 라틴어 성경 일부를 영어로 번역했고, 번역을 사주했다.

위클리프는 고위 성직자들의 부패를 고발하고, 성직자가 세속 정치에 관여해서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공격했다. 그러나 거기에 그치지 않고 루터처럼 성경이 믿음과 생활의 유일한 지침이라고 주장했다. 미사에서 신부가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면 그것이 진실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소위 ‘화체설’을 부인하고, 교황 제도를 부인하고, 다시 루터처럼 면죄부를 거부했다. 그리고 수도 교단의 폐지를 주장했다. 이런 사람을 교황이나 교회나 위정자들이 용서하고 수용할 수는 없었다.

위클리프는 철저한 반골이었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환영받지 못하고 별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보헤미아의 선각자, 얀 후스를 통해서 종교 개혁의 전야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후스는 이단자이며 위클리프의 제자라고 해서 화형을 당했다(1415).

1377년에 교황 그레고리 XI는 위클리프의 오류 18개를 지적하고 단죄했다. 그리고 위클리프가 죽은 지 근 30년 후 1415년에 열린 콘스탄스 공의회가 그의 오류 267개를 단죄하고, 그의 저서를 불태울 것과 그의 뼈를 파낼 것을 결정했다. 이를테면 부관참시형이 1428년에 집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