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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좌절한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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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한 개혁

본 내용은 대한성공회출판부에서 1998년 5월 발행한 책 <우리 믿음 바로 알기(김진만 저)>입니다. 게시를 허락해준 대한성공회출판부에 감사드립니다.

마리아의 개신교 탄압을 피해 제네바로 가서 장로교형의 유배인 교회를 운영한 사람은 스콧트랜드의 목사 존 녹스(?1514-1572)였다. 녹스는 한때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일했는데, 영국 교회의 공도문을 써야 하고 피난 온 영국 교회 주교들의 지시를 받는 것이 싫어서 칼빈의 초청을 받아들여 제네바로 갔다.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르자 대륙에서 개신교 인사들이 대거 귀국했다. 녹스는 전에 여자가 국왕이 되는 것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잉글랜드로 돌아가지 못하고, 스콧트랜드로 갔다. 녹스의 지도 아래 스콧트랜드 의회는 개혁 교회 고백을 채택하고, 16세기말에 가서는 스콧트랜드에 민족 장로 교회가 확립되었다. 칼빈파의 개신교가 장로교로서 확고한 민족 교회 지반을 세운 스콧트랜드는 성공한 개혁의 예이다.

그러나 영국(잉글랜드)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영국에서 칼빈식 개혁을 영국 교회에 도입하려고 싸운 사람은 제네바에서 훈련받은 토마스 카아트라이트였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완전히 좌절했다. 엘리자베스와 그의 막료들이 영국 교회를 개신교 식으로 개혁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왕 편 사람들의 눈에는 일반 신도들이 교회 운영의 주도권을 잡게 되는 장로교 조직은 위험천만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민간 정권이 교회 운영에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이 가능한 종래의 주교제의 유지를 택했다.

엘리자베스와 당시의 집권층은 모두가 반가톨릭이며, 개신교 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제네바의 정교 일치 구조가 보여주듯, 교회가 국정에 간섭하고, 교리와 개인 생활에 지나치게 엄격한 통제와 제재를 가하는 장로교나 청교도식 방식을 혐오했다. 또 전통적인 것—교회 장식, 사제들의 예복, 기도의 몸짓 등—을 모조리 추방할 것을 주장하는 청교도적 결벽성을 싫어 하였다. 한편, 영국에는, 특히 북부 영국에는, 무시할 수 없는 가톨릭세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여왕과 그의 가신들은 주교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과격한 개신교적 개혁을 물리치고, 소위 중도주의를 추구했다.

엘리자베스의 뒤를 이은 스콧트랜드의 제임즈 6세가 제임즈 1세로 영국왕이 되는 즉위식에서 녹스가 설교를 했다. 장로교를 잘 아는 왕이 등장해서 이제 잉글랜드에도, 아니 영국 전역에 스콧트랜드식 장로교가 세워질 듯했으나, 그것은 개혁파의 오산이었다. 제임즈는 스콧트랜드에서 사사건건 자신을 통제하고 간섭한 장로교를 싫어했다. 그는 엘리자베스가 남기고 간 영국 교회가 마음에 들었다. 엘리자베스와 제임즈, 그리고 그의 아들 찰즈에게는 주교가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고, 주교 없이는 나라의 통치도 통일도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18세기에 웨슬리 형제들이 영국 교회의 쇄신과 개혁을 시도했지만 좌절되고 결국 감리교로 떨어져 나갔다. 19세기 중반에 옥스포드 운동이 일어나서 교회 안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그 운동을 주도했던 많은 지도자들은 뉴먼을 필두로 로마로 넘어가는 비극을 낳았다. 이렇게 성공회의 개혁은 좌절의 역사를 겪어 왔지만, 성공회는 여전히 부단히, 조용히 개혁을 추진하는 교회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