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100문 100답 90. 캔터베리와 대주교들

90. 캔터베리와 대주교들

921
0
공유

캔터베리와 대주교들

본 내용은 대한성공회출판부에서 1998년 5월 발행한 책 <우리 믿음 바로 알기(김진만 저)>입니다. 게시를 허락해준 대한성공회출판부에 감사드립니다.

캔터베리는 영국 남부 켄트주의 도읍이다. 597년에 로마의 교황 그레고리는 오가스틴 수사를 영국(당시 부리텐)에 포교 사절로 보냈다. 이것이 영국 성공회의 시작이다.

당시 켄트왕은 에셀베르트인데, 그 여왕 베르타가 그리스도 교인이었다. 베르타는 영국에 도착한 오가스틴 일행을 환영했고, 오가스틴은 켄트 왕국의 수도였던 캔터베리에 여장을 풀고 그 곳을 선교 기지로 삼았다. 그 이래 캔터베리는 영국 교회의 중심지가 되고, 캔터베리 대주교는 전 영국 교회를 대표하는 존재가 되었다. 현재의 대주교는 오가스틴으로부터 103대 대주교가 된다.

오가스틴을 파송할 때 교황은 런던과 요크 두 곳에 교구를 세우라고 지시했었다. 그러나 캔터베리가 런던을 대신하게 되고, 결국에는 영국이 캔터베리 관구와 요크 관구로 나뉘게 되었다. 그 중 캔터베리 대주교가 서열에서 우선한다. 말장난같이 들리기도 하지만, 요크 대주교는 ‘잉글랜드의 수좌 주교’이고 캔터베리 대주교는 ‘전 잉글랜드의 수좌 주교’라고 한다. 현재 각 관구에 20개 내외의 교구가 속해 있다.

13세기부터 캔터베리 대주교는 교황 사절 자리를 차지해서 그 세가 막강했다. 그러나 일찍부터 캔터베리 대주교가 대표하는 교회와 국왕과의 관계는 항상 평화롭지 않았고, 긴장과 갈등이었다. 특히 노르망인들이 영국을 정복한 후 그런 불편한 관계가 두드러졌다. 헨리 2세가 교회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려고 교회 재판에서 심판받은 성직자들을 다시 왕의 법정에서 중형에 처하려 했을 때, 한때 왕의 친구였던 토마스 대주교는 결연히 거부했다. 결국 헨리의 부하들이 대성당에 쳐들어가서 기도 드리고 있던 대주교를 도끼로 학살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이것이 티. 에스. 엘리옷트의 [대성당안에서의 학살]이다. 헨리는 속죄하는 뜻에서 캔터베리의 수사들에게 곤장을 맞고, 토마스는 성인이 되었다.

헨리 8세 때 그의 결혼문제를 로마가 아니라 영국에서 해결하는 데 역할을 한 크랜머 대주교는 영국 교회를 개혁하는 사업을 시작하였으나, 미처 그 완결을 보지 못한 채 헨리의 딸 마리아의 손에 화형을 당했다. 17세기는 찰즈 왕들의 시대이고, 공화제의 시대이며, 왕정 복고의 시대이다. 그 시대는 로드 대주교(1573-1645)의 소위 ‘고교회’(하이 쳐치)주의의 시대이다. 로드의 고답적인 주교 중심주의와 국정 개입은 득보다 실이 많았다. 로드는 노골적으로 로마 쪽으로 기울어 있었고, 개혁전의 관습과 예전으로 복귀할 것을 바라던 사람이었다. 그의 상전인 국왕은 사실상 가톨릭교인이었다. 그러나 로드의 고교회주의는  200년 후, 19세기 중엽에 옥스포드 대학에서 시작한 옥스포드 운동으로 이어졌다.

20세기의 캔터베리 대주교 중 백미는 단연 윌리엄 템플(1881-1944)이다. 교회와 사회, 그리스도교 사회주의, 교회 일치 운동에 불멸의 자취를 남긴 템플은 ‘신학자들에게는 너무나 철학적이고, 철학자들에게는 너무나 신학적인’ 위대한 인물이었다.

에드워드 벤슨(1829-1896) 대주교는 1889년에 코프신부를 조선 교구 주교로 축성해서 한국 성공회를 탄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