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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헨리 8 세 (1491-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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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 세 (1491-1547)

본 내용은 대한성공회출판부에서 1998년 5월 발행한 책 <우리 믿음 바로 알기(김진만 저)>입니다. 게시를 허락해준 대한성공회출판부에 감사드립니다.

헨리는 헨리 7세의 둘째 아들로 1509년에 영국왕으로 즉위했다. 헨리는 전형적인 르네상스 시대의 국왕으로, 외국어에 능하고 음악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신학에도 관심이 있어서 루터에 반대해서 [7 성사론]을 지어서 교황에게 바치고 [믿음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헨리는 보수적인 사람이라 죽을 때까지 로마 교회에서 영국 교회를 분리시킨 후에도 가톨릭의 겉모습을 지켰다. 헨리는 영국 가톨릭의 원형이었다. 수도회를 몰수한 것은 돈이 아쉬워서였다.

헨리가 정실 카타리나와 이혼하려고 영국 교회를 세웠다는 말은 일리는 있지만 완전한 진실은 아니다. 우선 이혼 문제. 이론적으로 카톨릭교회에는 이혼이 없다. 결혼의 원인 무효가 있을 뿐이다. 헨리의 왕비 카타리나는 원래 그의 형수였다. 성경에 능통했던 헨리는 형수와 결혼하는 것이 하느님의 법에 어긋난다는 레위기의 구절을 상기하고, 처음에 형수와 결혼해도 좋다는 허가(관면)를 해 준 교황의 처사를 취소해 달라고 했다. 그 때는 교황이 카타리나의 친정인 스페인 왕가의 비호와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헨리의 청을 들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헨리는 교황의 관할권에서 벗어나서 영국 교회의 허가를 받아 카타리나를 버리고 앤 볼레인을 정실로 맞았다.

헨리는 아들을 얻어서 아들에게 그의 왕조(튜더)를 잇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카타리나는 마리아를 낳고, 앤도 바라던 아들은 못 낳고 딸 엘리자베스를 낳았다. 카타리나의 딸 마리아는 1553년부터 1558년까지 영국 여왕으로서 등극하자마자 영국 교회를 다시 로마로 복귀시키고, 그 동안 영국 교회를 로마에서 떼고 개혁하는 데 전력한 성직자들을 처형했다. 크랜머 대주교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사람을 많이 죽였다고 해서 ‘피비린내 나는 마리아’(불라디 메어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마리아가 죽은 후 이번에는 앤 볼레인의 딸 엘리자베스가 여왕이 되어 로마로 돌아갔던 영국 교회를 영구적으로 로마에서 떼어 내어 오늘에 이르게 하였다. 그러므로 영국 교회를 로마에서 결정적으로 분리한 사람은 헨리가 아니고 엘리자베스였다.

[헨리 8세와 여섯 아내들]이라는 영화를 연상하고 헨리를 피도 눈물도 없는 호색한으로 치부하는 것은 가혹하다. 르네상스의 군주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헨리와 대동소이한 인간들이었다. 그보다 더 많은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한 일이 별반 없다는 것이 그의 결함이었다.